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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가 있는 한[욜라 즐거운 육아일기 - 68]

메리는 학교를 마친 뒤 집에 바로 가는 법이 없다. 꼭 학교 운동장 놀이터에서 놀다 간다. 나는 운동장과 화단의 경계가 되는 나지막한 벽돌 울타리에 앉아서 메리를 기다린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메리 엉덩이를 받쳐 주거나 그네 줄을 꽈배기처럼 꼬아 주기 위해 불려 갈 때도 있지만 주로 벽돌 위에 앉아서 멍을 때린다. 따사로운 봄볕에 실눈을 뜨고 아이들 노는 걸 구경하면서. 그런데 ‘오징어’를 하고 ‘얼음땡’을 하거나 고무줄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죄다 어디로 간 걸까? 아이들만의 아지트, 그곳에서 모의작당을 하는 말썽꾸러기들도 보이지 않는다. 방과 후 스케줄이 꽉 차 있다 보니 놀이터에서 빈둥거릴 시간이 없기도 하겠지. 학원 시간에 맞춰 조금 남는 시간에 잠깐 왔다 가는 아이들, 놀이터에 왔으면서도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는 아이들, 놀이를 잃어버린 아이들, 놀이터를 찾지 않게 된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떠올리고 나는 자주 상심하고 있었다.

미세먼지 ‘나쁨’에다 모래바람까지 더해져 운동장이 마치 서부영화 세트장 같던 그날도 메리는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그때 남자아이 하나가 놀이터에 등장했다. 초등학교 4, 5학년 정도 되어 보일까. 그네를 타고 있던 여자아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와, ○○오빠다, 오빠! ○○오빠가 왔어!” 동급생으로 보이는 아이 몇도 저들끼리 놀다가 고개를 들고 아는 체를 했다.

제법 알아주는 유명인사인가 싶어 아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 꽈배기 그네 타는 메리와 친구. ⓒ김혜율
아이는 턱을 치켜들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터벅터벅 걸어온다. 이놈의 인기 따위 하며 귀찮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터프하게 걸어오고 있다. 그런데 터프하게 보이려고 너무 의식하고 있는지 걸을 때마다 무릎이 심하게 꺾여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미끄럼틀 가까운 곳까지 왔을까, 그 애는 잠시 주춤하더니 무언가를 다짜고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쟁그렁. 그건 배드민턴 채였다. 방과 후 수업으로 배드민턴을 치는 모양이다. 그런데 녀석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메고 있던 책가방까지 훌렁 벗어 들더니 패대기치듯 집어 던지는 것이다. 털썩, 하며 가방이 미끄럼틀 구석에 처박히며 먼지가 일었다. 쭈그러진 책가방 귀퉁이에 흙이 묻었다.

‘아니! 저, 저 녀석이! 요즘 아이들 물건 아까운 줄도 모르고?! 흥, 어린 게 벌써부터 어른 흉내 내면서 폼 잡는 것 좀 봐. 에휴, 세상 말세로구나, 말세야!’

지금껏 살아오면서 수없이 들어 봤음직한, 어른들이 하는 그 흔해 빠진 대사를 나 또한 아이를 향해 뱉어 내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계속 주시했다. 녀석은 무엇인가를 물색하고 있었다. 먹잇감을 찾는 맹수와도 같은 위험한 기운을 퍼뜨리면서. 아니, 이 못된 초등생아! 누굴 괴롭히려고 그래! 나는 녀석이 놀이터 기물을 파손하진 않는지, 허공에 발차기를 하며 힘자랑을 하진 않는지 눈을 부릅뜨고 감시했다. 녀석은 어슬렁어슬렁 그네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네 줄 하나를 낚아채었다. 그리고 그네에 앉아 발을 굴렀다. 발을 동개야 동개야 구르자 그네가 천천히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녀석은 내내 그네를 탔다. 이런,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일이! 우리의 터프한 오빠는 놀이터에 그네 타러 왔던 거다. ‘거칠어질 테다. 불량스러워질 테다. 비뚤어질 거다.’ 하는 모양이라도 아이는 놀이터에 와 그네를 탄다. 재밌는지 웃기도 한다. 세상 말세의 주역이라는 누명을 쓸 뻔한 아이는 알고 보니 순수하고 밝은 우리의 미래였다.

‘아줌마가 잘못했다. 오해해서 미안.’

나는 이후로 세상은, 그리고 아이들은, 우리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암울하지 않으며 반드시 좋아질 수 있는 가능성과 상상 이상의 희망이 있다고 여긴다. 아이들이 놀 만한 놀이터가 있는 한 더욱 그럴 것이다.

   
▲ 나 잡아 봐라 놀이 하는 메리와 욜라. ⓒ김혜율

하지만 밝은 미래와는 별개로 놀이터를 매개로 갖은 고생을 겪는 이들에게 놀이터는 지긋지긋한 현실이기도 하다. 아이들과 놀이터에 간 어른이 얼마나 지쳐 돌아오는지 떠올려 보자. 반면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놀다가 지치는 법이 없다. 해가 져서 사방이 어두워져야 겨우 집에 들어가는 아이들. 주말이면 아이들과 놀이터에서 살다시피 하시는 시어머니도 이젠 놀이터라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신다. 특히 저번 토요일 놀이터에서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은 어머니 가슴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할머니 집에 놀러 간 메리와 욜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제 할머니를 졸라 놀이터에 갔다. 로도 쫄랑쫄랑 따라갔다. 그리고 할머니가 동네 할머니들과 이야기하느라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메리와 욜라, 로는 누가 먹다 버린 과자 봉지를 발견한다. 어찌된 일인지 봉지 안에는 과자가 조금 들어 있었고 세 아이는 그걸 신나게 주워 먹다가 딱 걸리고 만다. 여기서 탄식 한 소절. “아이구,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어. 어찌 그걸 주워 먹어.” 어머니는 이 사태의 원인으로 평소 아이들에게 과자 주기를 엄격히 하는 나를 지목하시며, 아이들이 땅에 떨어진 과자를 주워 먹지 않게 하려면 도리어 과자를 물리도록 줘야 한다며 조만간 과자를 한 상자 가득 사 오겠다 선포하셨다. 하지만 똑같은 방법으로 어린 시절 새우깡 한 박스를 부모님께 선물 받았던 남편이 새우깡을 하루 네 봉지씩 까먹다 결국 새우깡을 비롯한 과자 매니아가 되었다고 고백을 했으니, 어머니의 방법에는 세심한 주의가 요망되는 바다.

놀이터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메리와 욜라 사이에 치고받고 하는 싸움이 붙었다. 이에 어머니는 둘을 뜯어말리며 서로 양보하라고 훈계를 하셨단다. 그런데 드라마에 가끔 나오는 할머니한테 대드는 철없는 손녀가 현실에도 존재한다. ‘왜 양보해야 되는데?’ 하고 메리가 할머니께 바락바락 대들었던 것이다. 뭐, 아무도 없는데서 그러면 살짝 뒷목 잡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백주 대낮 사방 천지 환한 놀이터에서, 삼삼오오 모여 노시던 동네 할머니들이 ‘저, 어른한테 말하는 것 좀 보게.’ 라며 수군수군 흉까지 본다면 어쩌겠는가. 어머니는 메리와 욜라에게 이럴 거면 할머니는 너희들 놔두고 멀리 가 버릴 거라며 놀이터에서 철수했단다.

   
▲ 놀이터에서 노는 욜라. ⓒ김혜율
그렇게 집으로 온 어머니는 화난 기세를 몰아 돌아누워 낮잠 자는 척을 했고 옆에 조로록 누워 있던 아이들은 진짜로 잠이 들어 버렸다고. 어머니는 일어나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침 국에 넣을 대파가 없네. 대파 한 단 사 와야겠구나 하는데 마침 메리가 잠에서 깼어. 두 사람은 욜라와 로가 잠든 사이 집 앞 마트에 얼른 갔다 오자 하며 발걸음을 서둘렀다고 하지. 그런데 그날 따라 계산대 줄이 길어 시간을 지체하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더니.... 세상에나, 어머니는 현관문을 여는 순간 너무 놀라 손에 쥔 대파 봉지를 떨어뜨릴 뻔하셨다네. 거실 한가운데 경찰관 두 명이 떠억 앉아 있지 않았겠어.

잠에서 깬 욜라가 112에 신고를 했더라고. “할머니가 우리를 버리고 멀리 도망갔다.”고 신고를 받은 경찰이 출동해 문을 따고 사건 현장을 덮쳤다네. 경찰은 신속하게 집 안을 수색했지만 할머니가 도망갔다고 여길 만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하던 중 마침 주방에서 밥솥이 김을 뿜기 시작했던 거야. 밥솥이 김을 쉬익쉬익 뿜자 온 집 안에 구수한 밥 냄새가 진동했겠지. 밥 냄새를 맡은 경찰은 할머니가 곧 돌아오실 것으로 직감했대. 그리고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 욜라를 달래 주고 있을 때 대파를 든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나타난 거야. 졸지에 아이만 두고 집을 나간 아동학대 범죄자가 될 뻔했던 어머니는 경찰관들을 돌려보내고도 놀란 가슴이 좀체 진정이 되지 않으셨다고 해. 그게 다 지긋지긋한 놀이터에서 비롯된 일들 아니겠어.

나는 그래서 같은 동지로서 어머니께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 없네.

어머니, 정말 놀라셨지요. 아이들과 놀아 주기 쉽지 않지요? 아이들이 어쩌려고 저러나 싶은 생각도 드시지요? 네, 맞아요. 요즘 애들 골치 아프다고 저도 생각하는 걸요.

그래도 어머니, 아이들 (그러고도) 괜찮을 거에요. 제가 봤거든요. 아이들 마음속에는 우리 어른들이 미처 알아보지 못한 희망이 있어요. 가능성이 있어요. 아주 작게 품고 있다가 결국 눈부실 만큼 크고 튼튼하게 키워 낼 거고요. 저는 그게 놀이터에서 이루어지는 거라고도 생각해요, 어머니. 앞으로도 우리 놀이터 자주 데리고 가요. 지금처럼 그렇게 아이들이 크는 거 지켜보기로 해요.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그러면서 육아휴직 5년차에 접어드는 워킹맘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떠안고 있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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