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한선의 '세븐' - 10]

1952년 리처드 닉슨은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 즉 부통령 후보에 지명된다. 아이젠하워는 2차 대전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만 되면 당선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가 약 2만 달러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실이 보도되었다. 여론은 악화되었고 후보 지명은 불가능해 보였다.

닉슨은 승부수를 띄웠다. 그는 7만 5000달러를 주고 NBC 방송국의 저녁 시간 30분을 사들였다. 그리고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자신의 정치자금 수수를 사과했다.

▲ 리처드 닉슨과 강아지 체커스. 불법정치자금 수수에 대해서, 닉슨은 자신의 딸이 체커스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도저히 돌려줄 수 없었다고 해명하였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친한 지인으로부터 1만 8000달러의 후원금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국민들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저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받은 것은 제 딸을 위한 코커스패니얼 강아지 한 마리뿐입니다. 까만 털에 하얀 점이 있는 녀석이죠. 여섯 살 먹은 제 딸, 트리시아가 체커스라는 이름을 붙였고요. 아마 여러분도, 꼬마들이 강아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든지 간에, 전 체커스와 같이 살고 싶습니다.” – 체커스 연설, 1952년 9월 23일, NBC (의역)

말도 안 되는 해명이었지만, 먹혔다! 그는 이후 8년간 부통령을 지냈다.

칠죄종의 특징은, 그것이 벗어날 수 없는 심리적 본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분노라는 감정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 양식이다. 옳지 못한 일을 경험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되는 분노의 감정에 무슨 죄가 있을까? 다만 정당한 분노와 무분별한 분노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고, 분노는 흔히 파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 또 다른 분노의 악순환을 유발하는, 즉 죄악의 씨앗이 된다는 점에서 경계해야 하는 것이다. 정욕도, 탐식도, 나태도 마찬가지다. 어떤 면에서 일곱 가지 죄악은 모두, 절대 부정할 수 없는 ‘인간성’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죄는 개인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경우가 있다. 2008년 교황청 내사원(Penitenzieria Apostolica)- 내사원은 교황청(Curia Romana)에 설치된 세 법원 중에 하나인데, 주로 사죄와 관면, 참회, 대사 등 죄사함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한다-의 잔프랑코 지로티 주교는 현대 사회에서 주목해야 하는 몇 가지 죄악을 발표하였다. 이를 이른바 신 칠죄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2008년 타임지의 ‘올해의 발견’에 선정되면서 유명해졌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지속 불가능한 사회적 불의’다.

지로티 주교는 사회적 불의가 인간성이라는 지평선에 불쑥 몸을 드러낸 새로운 형태의 죄악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과거 사회라고 더 정의로웠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사회적 불의’는 탐욕이나 분노와 같은 개인의 본성에 의한 ‘산발적인’ 죄악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모순적인 법과 제도, 끊임없는 세계화와 무한경쟁, 그리고 약탈적 자본주의의 논리라는 사회적 현상이 죄악을 양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는, 사실상 모든 사회구성원이 잠시도 쉬지 않고 죄를 짓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 잔프랑코 지로티 주교 (이미지 출처 = NewsCattoliche.it)
두 번의 부통령을 지낸 닉슨은, 바로 이어진 1960년 대선에서 존 케네디와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닉슨은 패배했고, 잇달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낙선했다. 그는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런데 케네디는 3년 뒤 암살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1968년, 닉슨은 은퇴선언을 뒤집고 다시 공화당의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였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력한 민주당 대선 주자였던 로버트 케네디(존 케네디의 동생)가 암살당하는 일이 또 일어났다. 닉슨의 당선 가능성이 유력해지는 순간이었다.

닉슨에게는 사실 엄청난 단점이 있었다. 그는 언론에 대한 심한 불안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자들의 질문을 즉석에서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60년 대선 당시에는, TV 토론에서 케네디와 맞붙었다가 크게 패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68년 대선 때는 TV 토론을 아예 처음부터 거부해 버렸다. 철저하게 사전 연출된 선거광고,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 암살 이후에 민주당 후보로 나선 허버트 험프리의 잦은 실책 등으로 인해서 겨우 당선될 수 있었다. 표차는 겨우 0.42퍼센트였다.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워터게이트 호텔에 있는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장치를 설치한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침입한 용의자의 수첩에서 백악관의 연락처가 나왔고, 닉슨 행정부는 곤경에 처했다. 닉슨은 CIA를 시켜, FBI의 수사를 방해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명백한 불법이었지만, 대통령 집무실에서 비밀리에 지시되었기 때문에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시 사실이 누군가에 의해서 들통나게 되었다.

▲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서. (1974)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사건 특별검사는 백악관에 집무실 녹음자료를 제출하라고 요청했으나, 닉슨 대통령은 오히려 특별검사를 해임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녹음 테이프를 끝까지 제출하지 않으려고 했다. 대법원이 만장일치로 제출을 명령하자, 일부 내용을 삭제한 테이프를 제출하는 식으로 대응하였다. 하원에서 탄핵 소추안이 의결되는 상황에 이르자, 그는 하는 수 없이 의회와 마지막 협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의 모든 위법행위를 면책해 줄 것, 그리고 테이프 내용을 영원히 공개하지 않을 것을 약속 받고, 결국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사회적 불의는 구조적인 문제다. 닉슨의 잘못을 개인적인 악덕이나 부족한 윤리 기준에서 보는 입장도 있지만, 사실 그가 천하의 악당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정치 제도가 가진 구조적인 모순과 결함, 그리고 당시 장기간 지속되던 미소 냉전과 베트남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은 이러한 부당한 정치적 행위를 싹트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사회적 불의는 절대 지속될 수 없다. 지로티 주교는 사회적 불의가 부자를 점점 더 부자로,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점점 더 가난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등한 악순환의 구조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다. 반드시 끝이 있게 마련이다.

▲ 워싱턴 D.C.에서 닉슨의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대, 매리언 S. 트리코스코. (1973)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렇다면 사회적 정의란 과연 무엇일까? 다양한 철학적, 신학적, 사회적 정의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개인과 사회 간의 공정하고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 특히 가톨릭 사회교설 7가지 주제 중 하나가 이러한 사회적 정의와 직접 관련되는데, 바로 권리와 의무 항목이다. 사회는 개인에게 존엄을 누릴 권리, 그리고 건강을 누릴 권리를 제공해야 하고, 개인은 사회를 위해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로티 주교가 말한 소위 ‘신 칠죄종’은 다음과 같다. 배아 세포를 이용한 유전자 조작, 환경 오염, 정당성이 결여된 과학적 연구, 약물 남용, 낙태, 소아성애 그리고 사회적 불의다. 소아성애를 빼고는 모두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의해서 양산되고 있는 ‘죄악’이다. 특히 사회적 불의는 이중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자세한 예를 들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사회적 역할에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은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것, 정당하게 주어진 몫 이상을 달라고 강요하는 것, 부당한 특별기회와 보상을 바라는 것 등. 오늘날 우리 사회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속 불가능한 사회적 불의’다.

 
박한선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영성과사회정신연구소 연구소장
성안드레아병원에서 마음이 아픈 환자를 돌보는 한편,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정신장애의 신경인류학적 원인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현재 호주국립대에서 문화와 건강, 의학 과정을 밟으며, 아보리진 사회를 조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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