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병역(兵役)이라는 한자말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쓰이지 않았다. 병역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 개념으로 군역이라는 말이 쓰이긴 했지만 대조해 보면 차이가 크다. 조선시대에 군역을 짊어졌던 양민들은 보통 16개월마다 두 달씩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나마도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훈련 대신에 군포를 내는 방식으로 변했다. 그러니 조선시대 양민들에게 부여된 역은 군대를 보조하는 것이되 직접 병사가 되는 일은 아니었다.

군역은 양민들에게 경제적 부담이기도 했지만 또한 천하게 여겨졌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황구첨정이니 백골징포니 하며 군역의 폐단이 극심하게 나타났을 때도 양반들은 사대부에게 군역을 짊어지게 하려는 계획에 극렬하게 반대했다.

한자어 역(役)의 생김새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럴 법하단 생각도 든다. 한편으론 몽둥이(殳)를 들고 걷는(彳) 군인을 상징하는 듯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몽둥이를 맞으면서 걷는 노역자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양반 자제들이 군대에 들어가서 일반 양민들과 뒤섞여 행군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병역이라는 말은 서구에 문을 연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공식 문헌에 등장했다. 그러나 유럽의 자유주의에서처럼 시민이 국가와 계약을 맺어서 권리와 교환한 의무로 인식할 수는 없었다. 병역 같은 근대적 개념은 성리학적 프레임으로 번역되어야만 동아시아에 소개될 수 있었다.

당시 중국에 서구의 개념을 소개했던 지식인은 권리와 의무 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국민은) 국가에 대해서는 의무를 지고 있다. 대개 의무란 권리의 원인이요, 권리는 의무의 결과다.” 다시 말해 공을 위해 사를 버린 뒤에야 개인의 권리를 보상처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관념은 지배자들이 인(仁)과 예(禮) 같은 성리학적 가치를 버린 뒤에도 민중들을 구속하는 도구로 계속해서 불려 나왔다.

국가 중심의 징병제, 경제 중심의 모병제

징병제의 시대는 그렇게 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이어 왔다. 한국에선 징병제가 유독 잔인했다. 냉전의 최전선에서 남과 북이 휴전선을 맞대고 전쟁까지 치렀던 터였다. 특히 미국의 세계구상에서 한국은 그야말로 ‘몸 대 주고 원조받는’ 지역이었다. 한국의 역할은 일본이 징병 대신에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받았던 것과 대조해 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젊은 남성들을 거의 공짜로 데려다 부릴 수 없었다면 이 좁은 땅덩이에서 상비군 60만 명과 예비군 200만 명을 항시 비상사태로 대기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병영문화가 이토록 폭력적인 건 한국에서 근대화 기획을 철저하게 '카피 캣' 전략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인간 중심'을 외친 것이 그만큼 뒤쳐진 생산양식 때문이었듯 남한에서도 군대 만든다면서 "다른 데서 5년 걸린 거 우리는 1년 만에 해야 한다"(초대 국방부 참모총장 채병덕)고 이야기할 땐 총 뿐만 아니라 군인들 신길 양말도 부족했다. 사람들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물적 토대를 만들어 온 것이다. 결국 그 엄청난 폭력을 견뎌온 건 제일 밑바닥 남성들이었다. 혹은 그네들이 바깥으로 나가서 스트레스를 풀 때 그 폭력 또한 견뎌야 했던 여성들이거나.

하지만 지배자들은 그처럼 많은 병력 수를 유지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는다. 군사 기술이 발달해서 미사일 사거리가 수천-수만 킬로미터를 오가는 시대다.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휴전선 철책을 하나하나 살펴보지 않아도 CCTV로 대강 확인이 가능하다. 어느 국가나 사이버전 부대를 양성하는 오늘날 적진 후방으로 침투하는 특공대는 잠수함을 타는 위험을 감당하지 않아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상대의 미사일 체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 비용 절감을 외치며 공기업을 없애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작은 군대’는 경제적 논리에 맞는다.

▲ 군인들. (이미지 출처 = flickr.com)

최근 한국 정치권에서 불이 붙고 있는 모병제론 역시 권력의 대차대조표에 따른 셈법에서 나온 방안이다. 새누리당 소속인 남경필 경기도지사나 정의당 소속인 김종대 의원이나 모병제를 주장할 때 같은 계산법을 공유한다. 젊은 남성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데 병력 수를 유지한다면 현역에 부적합한 ‘자원’들이 군인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선 병영 문제가 ‘자원’의 질 탓이 된다. 불량품들이 들어오니 품질 관리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병제론자들 주장처럼 가고 싶은 사람들만 가는 군대가 된다면 병영 사고가 줄어들까? 그건 군대의 속성상 불가능하다. 단적인 예로 훈련소 입소하면 심리, 인성 검사를 하고 나서 곧이어 정훈교육에 들어간다.

북한 정권이 얼마나 잔혹한지, 북한군에 대해 적개심을 품어야 하는 이유 따위를 한참 교육하는 현장을 떠올려 보자. 그 직전에 인성 검사를 통해서 순량한 자원인지 아닌지를 검사한 직후에 적개심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하는 모순적 공간이 군대다. 모병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월급 200만 원을 주고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되면 병영 사고를 줄어들 거라고 약속한다. 하지만 철밥통을 기대하는 전사는 그 자신의 이중심리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1922년 영국 공군 로런스 대령이 입대를 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이제 앞으로 7년 동안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다.... 군에 자원하는 삶은 삶에서 실패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까라면 까라며 불합리한 명령도 무조건 따르라는 한국 군대에서 월급 200만 원짜리 정규직으로 살아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까 의문이다.

이렇게 보면 징병제의 관점은 국가중심주의인 반면 모병제의 관점은 경제중심주의다. 전자가 노동력을 싼 맛에 마구 데려다 부려 먹는 제도라면 후자는 선택과 집중이 확실한 통치 방식이다. 어느 쪽이든 해당 장병들의 주체성을 박탈한다는 점에서 문제다.

병역의 관념을 넘어서 사회복무로

국가중심주의든 경제중심주의든 지난 날 한국 사회를 망쳐 왔다는 점에서 매한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군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병역’ 관념을 넘어서야만 한다. 징병제가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면서 의무만 지도록 강요했다면 모병제는 군복무를 아예 일부의 문제로 고립시킬 것이다. 어느 쪽이든 병역은 전근대적인 역(役)으로 남게 된다.

이참에 전면적인 사회복무제를 추진해 보면 어떨까? 사회복무는 말 그대로 사회적 활동에 복무하는 것이다. 예컨대 국방부에서 제일 머리 아파하는 징집대상이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다. 이들은 20대가 가장 전성기이기 때문에 그 기간 안에 성과를 내려고 갖은 애를 쓴다. 그 와중에 받는 징집통지서는 자신의 꿈을 계속 이어갈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적으로 가르는 선택을 요구한다. 그래서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병역면탈 행위가 가장 많은 직군이기도 하다. 만일 사회복무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한다면 이들은 20대 내내 자신의 꿈을 좇으며 열심히 노력하고 선수생활을 마친 뒤에 문화체육 분야 인프라가 부족한 지방에서 사회체육을 가르치는 분야에서 사회복무를 할 수 있게 된다. 기업이 영리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추구한다면 이런 분야 역시 사회복무 영역으로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복무라는 관점에서는 병사가 되는 역할 즉, 병역은 사회복무 중 하나의 형태가 된다. 노인들만 남은 어느 지방 작은 마을에서 노인들을 돕는 어느 청년의 사회복무는 병사로 복무하는 청년의 선택만큼이나 사회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그렇다면 군인이 되는 길만 신성할 수 있겠나. 우리 사회에 기여하려고 열심히 복무하는 시민들의 노력 하나하나가 모두 값지게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병역의 관념을 넘어설 때 비로소 노역자 취급을 받던 병사들 역시 시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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