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불능시대 넘어서기] ‘연옥의 병리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안

지난 두 세기 동안 근대는 단 하나의 ‘올바른 역사’였다. 근대는 더 나은 삶을 약속하는 유토피아였다. 유럽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이 이룩한 근대적 문명에 심취했다.

프랑스 혁명 직후에 활동한 프랑수아 기조와 같은 역사가들은 타락한 궁정을 엎어버리고 새로 세운 조국이 인간 이성의 결실이라고 믿었다. 성공한 혁명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 역시 자신들이 만들어 낸 성과가 보편적 역사발전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영국의 역사가들도 조국이 이뤄 낸 근대화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으로 면공업과 제철 및 제강업 등 새로운 산업이 확장하고 있었다. 증기기관을 이용해서 자동으로 면실을 뽑아내는 방적기 공장이 돌아가는 모습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조국이 과학의 시대를 열어 젖혔다고 굳게 믿었다. 영국은 근대 문명에서 가장 앞서 있었고 유럽이 뒤를 이었다. 토머스 버클은 "영국문명사"를 통해 이렇게 물었다. ‘다른 지역은 꿈만 꾸고 있는 동안에 영국에서는 어떻게 과학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는가?’

그는 그 이유를 영국의 자연적 환경에서 찾았다. 인도나 아메리카처럼 자연경관이 압도하는 지역과 달리 영국은 인간이 능히 지배할 수 있을 자연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자연을 통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연법칙에 대해 탐구할 여력을 갖추게 되었고 따라서 자신들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서 이성을 고양시킬 수 있었다.

근대, 오직 단 하나의 ‘올바른 역사’

이때부터 역사가들은 전 세계 인류가 뒤따라 올 수 있도록 오직 근대의 관점에서 역사를 써 내려가야 할 책임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책임이었다. 오직 문명인의 사명감에 의해 스스로 짊어진 짐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오만하게도 ‘백인의 짐’이라고 불렀다.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에 대한 열망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 갔다. 그러나 그 과정은 문명론자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숭고하거나 아름답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후예를 자처하며 이성에 대해 소리 높여 이야기했지만 그 이면에는 노예 무역과 식민 지배라는 폭력이 은폐되어 있었다. 당시에 문명사를 써 내려갔던 역사가들은 어떻게 유럽인들이 남다른 이성에 기초해서 국가를 세울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질문할 뿐이었다.

▲ 1671년, 루이 14세가 과학 대학을 방문하다. 과학은 자연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게 했다. 피터 바렛.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근대에 대한 열병은 곧 동아시아로도 퍼졌다. 1870년대에 들어서 ‘문명(文明)’이라는 단어가 영어 civilization의 번역어로 선택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개화’라는 표현을 처음 썼다고 알려져 있다. ‘문명개화’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의 계몽주의자들 역시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를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상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문명은 도달해야 할 과제처럼 보였다.

근대 문명은 왜 이다지도 중요한 과제였을까? 당시 일본은 서구 국가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고 사절단을 보냈지만 매번 무시당했다. 일본의 문명 수준이 충분히 근대적이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마치 어린아이는 금치산자라고 해서 스스로 재산을 책임질 능력이 없다고 보는 것처럼, 문명 수준은 어떤 국가가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인가 아닌가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어떤 국가를 두고 문명 수준이 떨어지는 ‘야만’ 상태에 놓여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 국가는 더 이상 독립국가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문명은 야만을 훈육하고 이끌 책임이 있었다. 그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고, 문명인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스스로 짊어진 짐이었지만 말이다. 이 시대는 ‘백인의 짐’이란 요상한 말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했던 시대였다.

국민성을 자연적 조건이 결정한다는 믿음

근대에 대한 열망은 그래서 식민지에서 독립한 지역에 훨씬 강렬하게 남게 되었다. 식민지 기간 내내 역사학자들은 식민지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물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저 지역은 어쩌다 식민지가 되었나?’ 일본의 식민주의자들 역시 조선인들이 스스로 국가를 세울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봤다. 역사학자들은 그 이유를 역사에서 찾았다.

역사학자들은 문명을 자연적 조건과 연관해서 설명했던 것처럼 식민지민들의 역사가 ‘미개한’ 이유도 자연적 조건에서 찾았다. 그들은 식민지민들이 자연조건에 굴복한 채로 그저 운명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라고 봤다.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이 걸어온 역사가 그러하리라고 생각했다. 조선인들은 반도라는 자연적 환경을 극복하지 못했기에 주체성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자신들이 식민지민들을 지배하는 이유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러니 한국이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후에도 식민주의가 심어 놓은 열등감은 끈덕지게 남았다. 한국의 국사학계에선 식민사관을 청산하겠다며 조선이 스스로 근대화할 수 있을 능력이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자 노력했고, 조선 후기에 농업이나 상업의 발달 속에서 자생적 자본주의의 씨앗을 찾고자 애도 썼다.

그러나 그 정도론 성이 차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불만은 단순했다. 조선인들이 왜 반도에만 갇혀 살았다고 말하는가? 조선인들의 역사적 영토를 반도에 가둬두는 것 자체가 식민사관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식민사관 청산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랬다. ‘한국인들은 고대시대 이전에는 대륙인이었다!’ 요즘도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상고사’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조선 등의 옛 영토가 대륙에 있었다고 믿는 강박이야말로 식민주의가 심어둔 욕망이 아닌가. 지리적 환경조건이 조선인들의 국민성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고 믿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 서점에서 판매되고 있는 "환단고기". (이미지 출처 = www.flickr.com)
튀니지의 반식민 혁명가였던 알베르 멤미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에도 식민지민들에게 끈덕지게 남아서 이어지는 식민주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리고 그날 억압이 종식되고, 우리는 우리 눈앞에 즉시 새로운 인간이 출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탈식민화가 이미 그것을 입증했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태가 이런 식으로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진정 새로운 인간을 보기 전에 식민화된 삶이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다.”

식민주의는 식민지민들의 삶을 해석하는 지배적 틀이었다. 독립을 쟁취해서 정부를 틀어쥐고 군대를 갈아엎어도 식민화된 인식은 오랫동안 남는다. 문명과 미개, 발전과 정체, 서양과 동양.... 멤미는 이처럼 지식과 가치가 식민주의 위계에 의해 이분법으로 나뉘어 지속된 것을 ‘연옥의 병리학’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식민지가 끝났지만 진정한 해방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연옥 말이다. 식민주의 연구자 에드워드 사이드는 이런 강박을 불러일으키는 병리 상태를 “참으로 지독하게 부착된 이류성(二流性)”이라고 불렀다.

연옥의 병리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한 길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존심을 되찾고자 종종 과한 태도를 보이곤 한다. ‘상고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런 실수가 보인다. 고조선이 대륙에 있었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역사 영토를 자의적으로 넓혀가는 동안 사료 해석에서 무리가 따르는 경우가 자주 보였다. 그럼에도 역사 영토를 어떻게든 대륙 중심으로 삼으려는 건 대륙적 ‘국민성’을 얻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닌가. 국민성이 지리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는 프레임은 그대로 유지한 채로 그 안에서 일류가 되려는 강박만 키우고 있는 꼴이다.

최근 가톨릭 사회운동 안에서도 원로들이 ‘올바른 역사관’을 강조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분들이 식민사관을 청산해야 한다며 자주 언급하는 것이 “노론벽파의 사대주의 사상과 권력 지향적 뿌리”다. 우리나라 지배층과 역사학계가 아직도 노론 출신 친일파들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한 포럼에서 함세웅 신부가 정의구현사제단 총회에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을 초청해서 강연을 듣고서 ‘분노가 솟구쳤다’고 회고했던 이야기가 대표적 사례다. 노론 출신 친일파들이 아직까지 주류 역사학계를 장악해서는 한사군이 대륙에 있었다는 이덕일 소장의 주장을 무시한 채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한 군현이 한사군이니, 이는 곧 고조선이 대륙에 있었다는 주장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함 신부는 이날 강연을 듣고 이렇게 한탄했다고 말했다. ‘아니 역사학자란 도대체 모두 친일파, 매국노인가?’

그러나 조선 후기 당파가 총독부와 짬짜미를 해서 현재의 한국 역사학계까지 지배하고 있다는 주장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한 조선인 역사학자 이병도의 조상이 노론이었고, 친일파 중에 노론이 많았다는 것인데, 숫자로만 본다면 전주 이씨나 안동 김씨 같은 가문처럼 흔한 성씨가 식민사관의 뿌리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노론사관이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 가져다 쓸 수 있겠지만 그처럼 대륙에 집착하는 강박 역시 ‘연옥의 병리’에 불과하다.

고개를 다시 돌려서 한국사회를 바라보자. 근대 세계에서 일류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 쉴 새 없이 달려왔지만 사회 곳곳에서 고통 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에 세계는 많이도 변하긴 했다. 중국이나 한국이 가난할 때는 유교가 나라를 망쳤다고 손가락질했지만, 1980년대에 들어서 한국, 타이완, 싱가포르, 홍콩 등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뜨니 유교자본주의니 뭐니 하면서 유교를 재평가하는 말들이 나왔다. 오늘날 한국은 근대 세계의 선두 그룹에 속한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근대가 약속했던 더 나은 삶은 아직도 요원하다. 경제성장의 결과가 가난한 이들에게까지 골고루 분배된 일도 없지만 고도성장도 더 이상은 어렵다고 한다. 지난 기간 군림해온 ‘올바른 역사’가 막바지에 다다른 모양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청산해야 할 식민주의는 근대에 대한 열망 그 자체가 아닐까? 문명이나 발전 혹은 대륙적 ‘국민성’처럼 크고 웅장한 것들만을 추구하도록 요구해온 병리 상태는 식민지민들에게 특히 깊게 심어졌다. 그러니 기억하자. 그분은 가장 작은 땅, 보잘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하신다고. 식민주의가 심어 놓은 병리 상태에서 진정으로 해방될 길은 거기에 있다.

 
 

백승덕(미카엘)
징병제 연구자.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에서 부의장과 교육위원장을 맡았다. 2009년 9월 병역거부를 선언했다. 용산참사, 쌍용차파업 진압에서 국가폭력이 맹위를 떨쳤던 해였다. 출소 후 징병제 연구를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양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과에서 ‘이승만 정권기 국민개병 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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