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예 부제가 병자성사를 하도록 하자"

(토머스 리스)

내가 여성 부제를 찬성하는지 지난주에 한 기자가 물었을 때, 나는 주저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남성 부제가 있다면, 여성 부제도 있어야지요.”

언론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여성 부제 문제를 연구할 위원회를 임명했기 때문인데, 위원에는 우리 <NCR> 동료인 필리스 자가노가 포함돼 있다.

자가노는 여러 글을 통해 초대 교회에 서품된 여성 부제가 있었다고 밝혀왔다. 여성 부제는 서방에서는 남성 부제와 같은 시기에 사라졌다. (편집자 주- 그 뒤 남성 부제는 있기는 했지만 사제와 독립된 직이 아니라 오직 사제가 되기 위한 전 단계로만 존재했으며, 최근에야 다시금 남성에게만 사제직을 전제로 하지 않은 종신부제직이 허용되었다.) 과거에 여성 부제가 있었다면, 그 논리를 따라, 우리가 오늘날 여성 부제를 갖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나는 자가노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지만, 솔직히 말해, 설사 옛날에 여성 부제가 없었다고 해도 나는 지금 여성 부제를 서품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이는 내가 여성 사제 서품을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12사도에 여성을 하나도 뽑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도 하나도 뽑지 않았다. (편집자- 12사도 중에 여성이 없으므로 교회는 여성을 사제로 서품할 권한이 없다는 교회의 공식 입장의 논리대로라면) 우리는 지금 유대인 가톨릭 신자 가운데에서만 사제를 서품해야 할 것이므로 진짜 심각한 사제 부족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하지 않았던 많은 일을 하고 있다. 보기를 들자면, 그들은 지금 우리가 성체성사를 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성체성사를 이해하지 않았고, 우리가 성체성사를 왜 집에서 하기보다는 교회에서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교회에 모셔 두고 있는 많은 성상들(우상들)을 보면 소름 끼쳐 놀랄 것이다. 교회는 (8-9세기에) 성화상이 우상이냐 아니냐를 놓고 아주 거친 논쟁을 거친 뒤에야 성상을 수용했다. 그리고 종교개혁 시기에 이 논쟁은 다시 불거졌다.

지금도, 가톨릭교회는 변화를 처리해야 하는 어려운 시기에 있다. 지난 두 교황 시기에 진지한 변화에 대한 모든 토의는 억압되었다. 지금,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가 다시 열었던 그 창문은 닫혀 있다. 이를 지적하는 이유는, 모든 새 제안은 다 수용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교회 안의 변화에 관한 진지한 대화와 토론, 특히 여성의 역할에 대한 얘기들에 우리가 열려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토론은 누구누구를 불러 욕하기가 아니라, 하느님백성을 위해 무엇이 최선인가를 찾는 주님 안의 형제들로서 일어나야 한다.

▲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 모인 부제들. (이미지 출처 = NCR)

부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내가 맨 앞에 여성 부제에 관해 질문 받았을 때 잠시 주저했다고 한 것을 주목하라. 내가 주저한 것은 “여성 부제” 때문이 아니라, 현재 미국에서 실행하고 있는 부제직 자체에 관해 생각했기 때문이다.

부제직의 쇄신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선교지에서의 현지인 사제의 부족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안되었다. 사실 그때, (대표적 선교지인) 아프리카의 주교들은 고맙지만 사양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부제보다는 평신도 교리교사를 쓰기를 선호했다.

그 부제직이 실제 적용되기 시작한 곳은 미국이었다. 전 세계에 종신부제가 약 4만 5000명 있는데, 이 가운데 약 40퍼센트인 1만 8500명이 미국에 있다. (편집자 주- 한국에는 한 명도 없다.) 조지타운 대학 사도직 응용연구센터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약 80퍼센트가 현재 활동 중이지만, 이들 현직 종신부제의 1/6만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돈을 받고 있다. 즉, 미국 종신부제 대부분은 무보수이거나 파트타임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미국 교회에는 많은 평신도 일꾼이 정규직으로 고용돼 일하고 있는데, 막상 서품된 부제들은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고, 이들 대부분은 세속적인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정규직 부제가 아니라 비정규직 부제를 서품하고 있는 것인가?

여기서 확인해 둘 것은, 내가 지금 부제들이 교회를 위해 좋은 일을 안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하지만 부제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른 평신도가 다 할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평신도는 독서직을 할 수 있고, (장례미사가 아니라) 장례 예절을 주례할 수 있는데, 이런 것은 부제들이 흔히 하는 일들이다.

평신도는 미사 때 복음 낭독 뒤에 강론을 할 수 없기는 하다. (부제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교회법 규정 때문일 따름이고, 쉽게 바뀔 수 있는 문제다. 어떤 이가 강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를 서품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냥 교회법만 바꾸면 된다.

물론, 부제는 세례를 줄 수 있는데 평신도 또한 할 수 있다. 나는 병원에 있을 때 한 수녀님에게 세례를 받았는데, 내가 태어나자마자 곧 죽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내 중간 이름(세례명)이 요셉인 것은 그 수녀님의 소속 수녀회 이름을 딴 것이다. 평신도에 의한 세례는 교회 역사를 통해 늘 인정받았다. (편집자 주- 수녀는 평신도가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해 서품 받지 않았다는 점에서 서품된 성직자와 대비되는 “평신도”에 속한다.)

또한, 부제는 혼인을 증거할 수 있지만, 가톨릭 신학에서 혼인성사의 교역자(minister)는 결혼하는 두 당사자다. 사제 또는 부제는 그저 “돕는다.”(assist, 교회법 1108조) 평신도가 이 (증거해 돕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실제 교회법 1112조에는 특정 상황에서는 이를 허용한다. (편집자 주- 1108조와 1112조의 assist를 한국어판 교회법에서는 “주례”로 표현하고 있다.)

진실은 우리가 보좌주교를 두는 것과 같은 이유로 우리가 부제를 둔다는 것인데, 그 이유란 그럼으로써 그들이 더 존중받는다는 점이다. 성직주의는 가톨릭의 영혼에 아주 뿌리 깊어서, 사람들은 한 평신도보다 한 부제에게 더 큰 경의를 보인다. 사제와 대중은 한 사제보다 한 보좌주교에게 더 큰 경의를 보이고, 심지어 이는 그 사제가 총대리일 경우에도 그렇다. 서품은 당사자의 실제 권한을 넘어선 지위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부제직을 구해낼 한 가지 길이 있다. 부제직에 사람들의 실제 필요에 봉사하지만 평신도는 할 수 없는 직무, 즉 병자성사를 포함시키는 것이다.

오늘날, 만약 여러분 가족 가운데 누군가 죽어가고 있어서 퇴근시간 뒤에 본당 사무실에 전화를 하면 사제가 나오기보다는 자동응답기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당신이 자리에 누워 죽어갈 때 병자성사를 받을 기회는 미국에서는 아주 적다. 운이 좋다면 어떤 사제가 병원을 정기 방문할 때 마침 그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다. 아니면 한 달에 한 번 평일미사 때 노인이나 병자에게 병자성사를 해 주는 본당에 속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저 당신에게 행운을 빌 따름이다.

부제가 병자성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 우리나라 미국에서 중요한 사목적 필요에 맞는 한 가지 성사적 직무를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다.

남성 부제가 병자를 도유했다는 역사적 증거는 많지 않지만, 흥미롭게도, 여성 부제들이 세례 때 여성들에게 기름을 발랐듯이 여성 병자에게 도유를 해 줬다는 증거는 있다. 자가노에 따르면, “성 에피파니오가 그에 대해 말했고, 장 다니엘루 등이 그것을 인정했다.”

만약 여성 부제들이 과거에 했던 행위들이 지금에 와서 남성 부제와 여성 부제 둘 다 병자성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근거 전례로 작용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니겠는가? 이는 교회가 여성 부제를 허용하기를 내가 바라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토머스 리스 신부는 예수회 소속으로 <NCR>의 선임 분석가이며 “바티칸 내부: 가톨릭교회의 정치학과 조직”의 저자다.)

기사 원문: https://www.ncronline.org/blogs/faith-and-justice/women-deacons-yes-deacons-may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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