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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성서 읽기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솔렌티나메의 복음(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읽는 성서의 실제)
홍인식  |  editor@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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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4.15  11:3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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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

민중성서 읽기, 다시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들의 눈으로 읽는 성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행되는지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 나는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가 인도한 니카라과의 솔렌티나메 지역에서 이루어진 성서 읽기를 소개한다. 우리는 이 지역에서 있었던 성서 읽기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성서의 의미가 어떻게 새롭게 이해되며,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 감으로써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어떻게 자리매김하는지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1. '솔렌티나메'에서의 성서 읽기

솔란티나메는 니카라과의 호수 끝에 있는 작은 섬이다. 이곳에서 1966년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는 '솔란티나메의 우리 숙녀'라는 작은 공동체를 만든다. 그는 이 조용한 마을에서 두 가지 사목을 시작한다. 첫째는 뒷날 세계적 명성을 얻은 미술 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그가 시작한 사목은 그 지역의 농민과 어민 등 지역 주민과 함께 복음서를 읽기 시작한 것이다.

매주 그들은 교회 혹은 가까이 있는 작은 오두막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카르데날 신부는 이들과 함께 공동체로서 성서를 읽기 시작한다.

이 모임에 참여한 지역 주민 중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서를 복사해서 나누어 주고 소리 내어 읽도록 했다. 대개의 경우 젊은이들이 이 일을 했다. 이 일을 맡은 젊은이들은 구절 하나하나를 명확한 발음으로 읽었고 이후 복음서를 들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발표하는 형식이었다. 나이가 많은 농민들은 대개 문맹이었기에 젊은이들이 읽어 주는 복음을 듣고 성서의 내용을 이해했다.

전통적이고 귄위주의적 성서 해석을 넘어서다

신부인 자신이 아니라 참여자들로 하여금 복음서를 소리내 읽게 한 카르데날 신부의 의도는 처음부터 복음서 해석에서 해석자로서 사제의 주도적 역할을 배제하고 해석 기능 수행에서 민중의 참여와 역할을 강조하고자 함이었다. 다시 말하면 해석의 분권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서 성서를 해석하는 데 사제인 자신의 주장 혹은 교회의 가르침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려고 했다.

다른 한편 그는 교회(혹은 교리)라고 하는 제도권을 넘어서서 종교 권력의 외부 혹은 주변부 민중의 해석자로서 주체적 위치를 강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성서 읽기의 장소를 교회로 국한하지 않고 농민의 삶의 현장으로 이동하곤 했다. 그리고 모든 참여자가 성서를 읽거나 들음으로써 내용을 파악하도록 했다.

이러한 행위는 당시 가톨릭교회 사제로서는 매우 파격적 행위로 간주되었다. 성서를 민중의 손에 그리고 성서 읽기 해석의 기회를 참여자들에게 주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농민들은 복음서의 내용을 다양한 방법으로 숙지한 뒤에 다시 읽기를 시도했고 이에 대한 자신들의 고유한 해석을 시도했다.

그리고 그것은 농민의 매우 능동적 참여로 이루어졌다. 카르데날 신부는 이러한 성서 읽기를 통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의 참여에 의한 공동체적 성서 다시 읽기와 해석을 시도했다.

   
▲ 니키라과의 솔란티나메.(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민중의 참여

카르데날 신부는 성서 본문 읽기가 끝난 뒤 농민들이 본문에 대해 이해한 것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도록 유도했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처음에 농민들은 말하기를 매우 꺼려하고 두려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점차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카르데날 신부를 비롯한 참여자들은 "농민들은 무지해서 사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혁명 과정에서 아무런 동력도 가질 수 없다."라는 통설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깨달은 것은 농민들의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공포가 그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대화에 참여한 것은 남성만이 아니었다. 여성도 활발하게 의견을 나타내기 시작함으로써 공동체 안에 잠재해 있던 남성 우월의식과 가부장적 생각들을 극복하게 하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는 어린 아이들도 성서 읽기 대화에 적극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여를 통해 이 지역의 농민들은 점차 자신들 삶의 주체적 위치를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소브리노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신학의 장으로서만 기능하는 것뿐 아니라 신학적 성찰에서 주체로서의 기능을 회복했다. 성서 읽기를 통해 농민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중심이고 교회의 성육화로 이해되었다. 곧 민중이 교회임을 재확인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은 성령의 활동과 나타남의 중심적 장소로 여겨졌다.

주체로서 성서 읽기

가난한 사람들은 성서 읽기를 통해 점차 자신들의 소극적 삶에서 벗어나 역사 변혁 신앙에서 주체적 위치를 찾게 되었다. 농민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의 성찰은 성서 전문가로 여겨지던 신학자들을 놀라게 했다.

문맹자이며 나이가 많았던 어부 토마스 페냐의, 루카 복음 5장 1절에서 11절에 대한 성찰에 모두가 놀랐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물을 거두어서 고기를 잡아 올리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기적이 발생합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아주 소박한 기적입니다. 번영의 기적, 부자 됨의 기적이 아니라 소박한 기적입니다. 베드로는 고기를 잡아 올림으로써 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어느 누구도 부자로 만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도 부자 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소박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기적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기적은 소박함입니다."

어떤 지역 주민은 예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은 사건과 예수가 안식일 법을 어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마태 12,1-13 참조)

“예수님이 하신 일은 전혀 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휴일에 내가 아무런 일도 안하고 쉬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내 친구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비록 쉰다고 했지만 친구들을 위해 몇 마리 물고기를 잡기 위해 일하러 나가겠습니다. 그들은 내 형제들이니까요. 쉰다고 했지만 친구와 형제를 위해 일하러 가는 것이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솔렌티나메의 주민들의 성서 읽기는 이처럼 주도적인 해석자의 인도 없이 순전한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 대화는 자신들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의 성찰로 이루어졌다. 솔렌티나메의 성서 읽기는 성서 해석을 교회의 전문가들로부터 가난한 사람의 삶으로 불러들였다. 이러한 성서 읽기는 일방통행식의 선포적 설교에서 삶의 현장과의 대화와 소통이 요구되는 쌍방의 선포로 만들었다.

오늘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듣고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설교와 강론이 삶의 현장, 특히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와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허공에 외치는 공허한 소리가 될 뿐이다.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는 이처럼 강단이 삶의 자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부터 오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솔렌티나메의 복음의 실례들

솔렌티나메 지역 주민들은 이러한 성서 읽기를 통하여 점차 정치적 모임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고 그들의 삶의 변화를 위해서는 정치적 투쟁이 함께 수행되어야 함을 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점차 의식화되었고 사회주의적인 입장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니카라과 정부는 이들을 불순분자들로 여기기 시작하였으며 공산주의자로 낙인찍기에 이른다.

뒷날 에르네스토 카르데날은 이러한 현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지역 주민들의 급진적 사회주의화는 마르크스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성서 읽기를 통해 그리고 성서에 대한 지역 주민들 스스로의 해석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었다. 그들은 성서 읽기를 통해 성서의 메시지가 매우 급진적인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마치 마르크스의 사상처럼 급진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성서 읽기가 그들로 하여금 사회 변혁에 대해 급진적 입장을 갖게 만들었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억압과 지독한 가난의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결과다. 그리고 이러한 급진적 입장을 갖게 된 그들을 정부 권력은 공산주의자라고 규정한다. 그들을 공산주의자로 부른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정부 권력이었다.”

1. 루카 복음 1,46-55 ‘마리아의 노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규정과 비판에 대하여 성서 읽기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루카 복음 1장의 마리아의 노래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어민 베드로: 만일 헤로데가 마리아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높은 사람들을 그들의 자리에서 내리치고 낮은 사람들을 높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마리아의 노래를 들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나탈리아: (웃으면서) 마리아가 미쳤다고 말했겠지.

로시타: 아마 공산주의자로 의심된다고 했을 거야.

라우레아노: 아냐, 의심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공산주의자라고 확실하게 말했을 거야. 니카라과 정권이 우리 솔렌티나메 마을에서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듣는다면 뭐라고 할까?

청년 1: 가난한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할까?
청년 2: 혁명이라고 하겠지!

2. 마태오 복음 10,34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안테노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늘 불의가 판치는 세상이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불의한 세상을 끝내기 위한 것이잖아. 그는 불의와 싸우러 오는 것이지. 그러기에 검을 가지고 오는 거야. 그리고 그는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싸우시지.

마르셀리노: 예수님은 아주 날카로운 무기를 가지고 오셨어. 그것은 그분의 말씀이야. 그 말씀의 무기는 그가 우리를 위해 가져오신 거야. 그리고 우리는 그 무기를 오늘 이 시간 이 모임을 통해서 공급받고 있다고 생각해.

익명의 어민1: 예수님은 현상 유지의 생각을 반대하시는 분이야. 그래서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거야.

익명의 어민 2: 어떤 사람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그냥 조용히만 살려고 하기도 하지....

아르만도 청년: 나는 두 가지 종류의 평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그냥 불의를 용납하고, 그리고 착취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내면서 불의를 일으키지 않는 평화이고, 또 하나는 모든 잘못된 일들이 잘 해결되고 그리고 정의가 이루어질 때 우리가 누리게 되는 평화라고 생각해요.

라우레아노: 나는 여기서 예수님이 자기 혼자서 모든 일들을 바꾸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아마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싸우라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아르만도 청년: 그런데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꼭 투쟁이 필요한가요?

라우레아노: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모든 세계에 정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익명의 어민 1: 예수님은 세상의 변혁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믿어. 다시 말하자면 혁명이지. 그러니까 그분은 이 땅에 화평이 아니라 전쟁을 주려고 오신 거라고 생각해.

그 뒤 솔란티나메에서의 성서 읽기는 니카라과 정부의 탄압을 받았고 에르네스코 카르데날 신부는 코스타리카로 망명을 떠나고 만다. 그 뒤 그는 니카라과의 소모사 독재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하여 산디니스타 혁명군에 가담하여 마침내 1979년 소모사 정권을 몰아내는 혁명에 성공한다.

솔란티나메의 성서 읽기는 성서가 더 이상 신학 전문가, 교회 권력 그리고 교리 안에 갇혀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삶, 특히 가난한 사람의 삶의 자리에서 읽히는 열려 있으며 살아 있는 생명의 말씀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성서를 통해 들리는 하느님의 말씀은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갇혀 있을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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