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피임이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을 속풀이를 통해 알려 드려야 하는 것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하지만 피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그것을 대하는 신자들의 (일반적이라 보이는) 견해를 다뤄 보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듣자하니 신자들의 70퍼센트 정도가, 교회에서 제시하는 ‘주기관찰’ 등의 노력을 통해 가임기간을 피하는 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들을 사용해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흔히 인공피임이라고 불리는 행위에 대해 교회의 근본 입장은 이렇습니다.

주기적인 절제, 곧 자기 관찰과 불임 기간의 이용에 바탕을 둔 출산 조절은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에 합치되는 것이다. 이 방법들은 부부의 육체를 존중하고, 그들 사이의 애정을 북돋우며 진정한 자유를 가르쳐 준다. 반면에, “부부 행위를 앞두고, 또는 행위 도중에, 또는 그 자연적인 결과의 진행 과정 중에, 출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거나 수단으로 하는 모든 행동은” 근본적으로 악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2370항)

남성용 콘돔.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쉽게 말해서, 주기적인 절제 방법이 아닌 다른 방식의 피임은 근본적으로 악이므로 곧, 죄를 짓는 행위가 됩니다. 이때 말하는 도덕성의 객관적 기준이란, 참사랑이라는 맥락 안에서 부부 서로가 자신의 전부를 주며, 그 결과로 생명을 출산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혼인 제도 자체와 부부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652항 참조)

주기관찰을 통해 임신을 피하려고 하면서 생명 출산의 의미를 담는다는 것은 모순된 논리로 보입니다. 하지만, 부부가 그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도 아기 양육의 현실적 어려움을 경감하고자 하는 것(예를 들어, 연년생 형제를 키우기보다 일정한 터울을 두고 아기를 낳음으로써)은 사려 깊고 책임감 있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확률적으로’ 임신하기 어려운 시기를 활용하여 부부가 사랑을 나누고자 합니다. 반면에, 욕망만이 우선되는 사랑 행위가 있습니다. 출산의 가능성을 차단한 태도입니다.

교회는 전자와 같은 책임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후자의 사랑은 부부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채,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는 다양한 사례들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이런 경우는 관계상 그 자체가 제6 계명을 위반하고 있는 상태라 하겠습니다) 피임기구나 약을 사용함으로써, 특히 여성들이 육체적으로 당해야 하는 불이익은 흔히들 간과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인공적 피임에 반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활용하기 편리한 만큼 부부가 서로의 육체에 대한 이해와 존경심,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대한 배려는 쉽게 잊을 수 있습니다. 부부가 사랑의 정서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을 표현하고 나누는 일은 장려되어야 할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결실로 주어지는 자녀 출산이 분명 커다란 선물이기는 하지만, 오늘의 현실은 아이들 양육에 매우 힘든 환경입니다. 제 주변의 부부들 중에 아기를 낳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그렇게 해결해 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 3달 된 태아의 모습.(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믿음이 강한 이들은 ‘생기는 대로 낳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아기가 하느님이 허락하시어 주시는 선물이며, 허락하시기에 생긴다는 걸 굳게 믿는 이들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어떤 이들은 ‘피임이 낙태보다 훨씬 작은 죄’라고 말하고요. 부부 사이의 내밀한 애정에 더 무게를 싣고 있으면서도 아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확실하게 해 두지요. 자기의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 죄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부 사이의 열정이 고조되어 일치감을 느끼고자 하는데 주기법에 따른 합당한 시기와 꼭 맞지 않기에 편리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갑자기 죄가 된다는 것을 정서적으로 납득하기 힘듭니다. 속풀이 독자분들의 생각은 어떠하오신지요?

이런 상황은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필요한 때입니다. 사람의 감정이란, 그것을 표현하고 말고는 의식적으로 조정 가능하지만, 느낌이 그렇게 다가오는데 그것을 개인의 구미에 맞게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말할 때 조작하여 표현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주일에 미사참례를 해야 하는 걸 의식적으로는 알지만 무기력감이 강하게 일거나, 혹은 성당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어떤 이에 대한 거부감 등 감정적 차원의 반발이 너무 거세면 주일미사에 빠지기도 하지 않나요?

그러니, 교회더러 피임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바꾸라고 요청하기에 앞서 부부는 둘의 사랑을 늘 확인하시며 살아가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을 나눌 때,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것인지 늘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새로운 생명이 생길 것이라는 희망도 늘 함께합니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거둬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부가 출산과 관련하여 느끼는 두려움은 전적으로 부부들이 책임지라고 말하기 전에, 교회도 공동육아에 대한 꿈을 함께 꿔 줘야 한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혼인하고도 아이를 갖지 않으면 잘못일까?”참조) 어찌보면 이것이 교회에 요청해야 할 더 중요한 제안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공피임은 죄라고 할 것이지만, 더 큰 사랑으로 넘어서기를 꿈꿉니다. 오늘의 맥락에서 예를 들자면, 그게 공동육아로 드러나는 연대의 힘이겠습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이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벌어진 일이라면.... 까짓 거! 희망적이지 않나요?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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