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역사적으로 실존했는지 여부도 알 수 없는 성인들까지 등장시켜가며 신앙생활의 모범으로 삼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공인된 성경(정경)엔 등장하지 않는데, 비공인 성경(외경)에는 등장하여 그 이름이 전해지는 성인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톨릭이나 정교회 문화에서 커 온 이들에게는 이런 성인들에 대한 정보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것인데,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이들에게는 이런 정보에 대한 문제제기가 당연하다 싶기도 합니다.

▲ 아기 예수를 목에 태우고 강을 건너는 크리스토포로.(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성모님의 부모로 알려진 요아킴과 안나 성인, 아기 예수님을 목에 태우고 강을 건넜다는 크리스토포로 성인의 전설적 일화, 예수님이 탄생하는 마굿간을 찾아 별을 따라온 세 명의 동방박사(멜키오르, 발타사르, 가스파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오른 편에 있던 도둑 디스마스(디스마) 등등 많은 인물들과 사연이 있습니다. 음.... 게다가 아예 사람이 아닌 존재의 이름(예를 들면 미카엘, 라파엘, 가브리엘 같은 대천사)을 세례 때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이 어떤 분들에게는 좀 과한 성인 공경으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신화적이고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라 할지라도 신앙의 깊이를 더해 주는 데 그만큼 도움이 된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신앙과 관련하여 다양한 이야기들이 전승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야기에 마음이 움직인 수많은 이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지닌 위력에 대해서 어떤 랍비의 이야기를 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이야기에 앞서 간단히 배경 설명을 해야겠습니다. 동유럽에 퍼져 있던 유대교 지도자 중 바알-쉠(바알-솀)이라는 랍비는, 18세기에 유대교 신비주의의 한 운동인 하시디즘을 창시합니다. 이 영성운동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중시하여, 그에 걸맞게 삶을 꾸려 가려는 정신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위력에 관해 어떤 랍비는 그의 할아버지가 바알-쉠에 대해 증언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어떤 랍비가 있었는데, 그는 바알-쉠의 제자였던 어떤 사람의 손자였습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그 랍비에게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랍비가 대답하길, 이야기를 할 때는 이야기가 그 자체로 영향을 줘야 하며,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난 뒤, 그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마비 상태로 살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와 할아버지께, 할아버지의 사부에 대해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기에, 할아버지는 당신의 사부 바알-쉠이 기도할 때, 자리에서 어떻게 뛰었으며, 어떻게 춤을 추었는지를 아주 자세히 이야기하는 데 몰입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부께서 그런 일을 어떻게 하셨는지 잘 보여 주려고,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면서, 자리에서 일어서셨고, 자기 자신이 자리에서 뛰고 춤을 추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할아버지는 치유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야기를 들려줘야 한다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이처럼, 이야기를 이루는 숭고한 본질은,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사람을 통해 영속하며, 이야기 자체 안에서 계속 유지됩니다. 자기 할아버지에 관한 랍비의 증언은 결국 할아버지가 증언하는 스승 바알-쉠에 관한 증언이 전해져 온 것입니다. 무엇이 이렇게 영속하는 이야기의 본질이겠습니까? 그 이야기가 가지는 가치와 생명력입니다. 랍비의 할아버지가 경험한 사건을 손자인 랍비가 목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주려고 그 이야기에 몰입한 할아버지에게 이야기 자체가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전해 줍니다.

생각건대, 전설적이거나 신화 같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전승되어 오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면, 우리도 성인들의 삶을 살아 낼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건 다 뻥이야’라는 말은 이야기의 숭고한 본질, 그 생명력을 거부하고 상상력을 죽이는 태도입니다. 이야기가 지닌 생명력을 거부하는 삶이 얼마나 메마른 것인지는 그런 말을 하며 살아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와 그분 자신의 말씀이 지금까지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 각자 안에서 그 이야기들이 계속 위력을 발휘하도록 허락해야 하겠습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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