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 - 박종인]

요즘의 사회 현실에서 결혼을 한다는 것은 종종 대단한 행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경제적 이유로 결혼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제법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주변에 소위 결혼 적령기(아무래도 20대 후반이겠죠?)를 넘어섰음에도 결혼할 생각이 없거나, 더 나이가 들어서도 결혼에 대한 의지를 보이지 않는 지인들을 보면 결혼은 예전에 비해 더 특별한 사건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서로의 반쪽을 찾아 둘이 하나가 되고자 결혼이라는 특별한 예식을 통해 부부가 되었음에도 자녀를 가지지 않았거나 가지지 않으려는 젊은 부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결혼하고 자녀를 갖지 않는 것이 잘못인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임신을 할 수 없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임신 능력을 가진 부부가 아기를 낳지 않는다면 과연 잘못일까요? 매우 민감한 질문이라 공적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저는 교회의 공적 입장에 비춰본 제 개인적인 이해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속풀이를 읽는 분들은 무작정 제 개인적인 의견을 교회의 입장으로 오해하지는 마시고, 개인적인 견해를 저처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녀 출산에 대한 요청은 비신자들 사이의 결혼보다는 신자들 사이의 결혼, 곧 혼인성사로 맺어진 부부들에게 ‘의무’처럼 다가오는 듯합니다. 교회가 정의내리는 혼인 서약은, 그것을 통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그 본연의 성질상 부부의 선익과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을 지향하는 평생 공동 운명체를 이루는 것”으로서 성사의 품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교회법 제1055조 참조). 그러므로 혼인 서약을 온전한 것으로 만들자면 부부의 선익(부부 사이의 정신적 · 육체적 관계)과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일이 내용상 모두 포함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이 신자 부부들에게 자녀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식을 안겨준다고 하겠습니다.

자녀 없는 부부, ‘잘못’이 아니라 ‘과정’으로 생각해야

교회는 혼인성사를 통해 남녀 사이에 성관계를 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된다고 간주합니다. 그리고 성관계는 수순대로 가자면 자녀 출산으로 이어집니다. 자녀가 생기면 좀 더 긴 시간을 두고 양육의 과정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부부 관계는 남편과 아내 둘만의 주제가 아니라 자녀들과의 관계로 확대됩니다. 서로에게 충실하며 친절하고 따스한 부모를 보며 자라는 아이들은 그만큼 정서적인 안정감을 키워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이탈리아의 한 경당에서 세례를 기다리고 있는 아기 ⓒ김용길

살펴본 바와 같이, 교회가 이해하는 혼인이란 남녀가 서로의 일치를 구체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즉 부부 사이의 육체적 결합의 권리가 부여되며, 그 결과로 이어지는 출산을 예상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부의 선익만을 추구하는 것은 자녀의 출산 및 교육이 빠진 것이기에 혼인 서약을 온전히 이루려는 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완성되지 않았으니 그 과정에 있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혼인 서약을 깨는 것은 부부를 이루는 남녀가 서로 맺고 있는 단일성(부부는 일심동체라는 특성)을 훼손할 때 생기는 것이지, 아기 출산을 우선적 이유로 들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기를 낳기 위해서 결혼했는데 결과적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기에 결혼에 대해 재고하고 있는 부부가 있다면, 이 사안은 또 다른 경우이므로 여기서 다루지는 않겠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할 일은 결혼에 대한 의미를 다시금 확인해 보는 것이며, 어찌하여 젊은 부부들이 가임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아기를 낳지 않으려 하는지 그들 마음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도대체 어떤 상황이 아기를 낳으려는 의지를 이들에게서 앗아간 것일까요?

해주는 것도 없이 아이만 낳으라는 병든 사회

그것은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두려움이라 하겠습니다.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부부 둘만 생활해 나가기도 빠듯한 사회입니다. 아기는 축복이란 걸 알면서도 그 양육에 대한 책임을 요구합니다. 낳기만 해서 끝날 일이면 좋겠으나 양육은 긴 시간을 요구합니다. 그렇다고 이 사회가 대가족 문화를 유지하고 있어서 가족 구성원들이 아이를 같이 키워주는 것도 아니고, 육아를 도와주는 정책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아기에게 집중하려니 현실적으로는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그것이 두렵습니다. 도태될 것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일도 다 하고자 합니다. 그러자니 너무 힘이 듭니다. 직장에 어린이집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은 직원들의 복리후생에 대한 센스가 있는 회사에나 있을 법한 일입니다. 설령 있다 해도 요즘 세상에 그런 직장을 아무나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자니 대부분 여성들은 일을 선택하고 출산을 미루고 싶겠지요.

서민들은 허리가 휘어지게 해놓고, 주는 것도 없으면서 아이만 낳으라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없습니다. 이 현실을 지켜보는 젊은이들은 늘 명확한 자기 변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치 못한 사회에서 부부가 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아이를 키우는 것은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그들은 자신이 없다고 말합니다. 젊은 부부가 지닌 두려움의 원천입니다.

자녀 양육 함께하는 교회를 꿈꾸며

그렇다면 교회는? 부부에게만 책임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교회 차원에서 실제로 생명을 받고 키워낼 수 있는 도움을 주고 있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이 사회는 경쟁만을 이야기하고, 그 경쟁은 부와 권력만을 주제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물신숭배가 야기하는 구조적인 부조리 앞에서 좌절하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교회가 양육 시스템에 대해 고민하고 그것을 각 지역 본당을 중심으로 구축해 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실현될 때, 복음도 전파되고 부조리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로 바뀌는 전환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낳아 교회에 맡길 수만 있다면, 두려움 때문에 출산을 기피하는 이들은 그만큼 줄어들 것입니다. 낙태는 죄악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아이를 낳아주세요. 제가 키우겠습니다”라고 했던 마더 데레사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청소년사목을 담당하고 있다 보니, 늘 마음 한 켠에는 ‘보육사목’에 대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용기 있게 아기를 낳은 엄마들이 생계를 위해서 일은 해야 하기에, 자신들의 아기를 돌봐줄 곳을 필요로 할 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저는 제 신분상 아예 결혼을 할 수 없기에, 보육사목을 할 수 있다면 아이를 양육하면서 저 역시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에 그렇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이를 키워보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어른이 될 수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진정 어른이 못 됐다고 고백합니다.) 이 녀석들 잘 키워 수도원 보내려는 ‘흑심’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창조 사업에 협조하길 원하시는 하느님께서 저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기를 출산할지 말지는 부부들이 결정할 몫입니다. 여러 이유로 지금 당장은 출산 계획이 없다고 해도 부디 그 기저에 두려움이 없기를 바랍니다. 즉 두려움은 떨치고 선택하시라는 뜻입니다. 두려움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임마누엘)”는 현실을 망각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두려움을 느끼시는 분들은 (저 같은) 이웃에게 알려주세요. 함께 나누면 두려움이 사라지니까요.
 

 
 

박종인 신부 (요한)
예수회. 청소년사목 담당.
“노는 게 일”이라고 믿고 살아간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