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비평 - 박병상]

설악산에 삭도, 아니 케이블카 설치가 심의 의결된 날, 돈에 눈이 어두운 자 이외,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저주를 받은 느낌이었다. 설악산의 케이블카는 지리산으로 이어질 태세다. 머지않아 덕유산과 오대산과 월악산에서 심의를 요구할 것이다. 수려한 자연을 후손에게 보전하려는 국립공원은 천박한 유원지로 바뀌어 산을 경외할 생각이 없는 이들로 떠들썩할 날이 멀지 않았다.

케이블카가 민주적이라고? 경사가 깊고 많은 시간이 걸리는 길을 케이블카가 빠르게 이어주므로 민주적이라고? 케이블카가 설치된다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르긴 해도 부담스런 이용료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탑승할 자격이 주어지므로 민주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산에 오를 엄두를 낼 수 없는 장애인도 설악산 정상에 오를 수 있으므로 민주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장애인에게 여전히 탑승이 어려운 시외버스와 고속버스의 설비부터 바꿔야 한다. 사막에 스키장이 허가되고 툰드라 지역에 마라톤코스를 만들어야 옳다.

한계가 있으면 이해하고 배려해야 마땅하지만, 민주주의는 무조건이 아니다. 웬만하면 소형차로 장거리를 운행하지 않는다. 세발자전거를 타고 거리를 나서지 않는다. 키 작은 이가 민주주의 운운하며 공공연히 농구팀에 끼워 달라고 주장하면 참 난감할 것 같다. 나이 들어 다리에 이상이 생기면 암벽 등반은 삼간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관계가 없다. 여성의 일을 남성도 해야 공평한 건 아니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 여성이 맡는 일은 남성과 다르다. 그건 성별 차이일 뿐 차별이 아니라고 일찍이 이반 일리히는 설파했다.

▲ 설악산 중청 대피소에서 대청봉에 이르는 길.(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설악산 정상에 오르면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들지만 다른 방법으로 행복을 맛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왼쪽 무릎에 통증이 오면서 높은 산을 찾는 기쁨보다 친구와 만나는 데에서 행복을 찾게 된다. 그렇다고 높은 산을 척척 오르는 젊은이를 대견해할 뿐 질투하지 않는다. 비슷한 연령을 가진 친구가 높은 산을 누비면 잠시 부럽지만 그때뿐이다. 나이에 맞는 운동이 많을 텐데, 걱정하며 다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다. 나이 든 이를 위한 케이블카에 민주적 배려를 조금도 느끼지 않는다.

케이블카가 생태적이라고? 케이블카가 생기면 그 아래로 산양이 지나다닐 수 있으므로 생태적이란다. 그럴까? 케이블카가 정물의 하나로 인식될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야 할 텐데 그 사이에 고장은 나지 않을까? 그때까지 설악산의 산양은 살아남을까? 등산로가 케이블카 운행되는 즉시 폐쇄된다면 모를까 기존 등산로와 더불어 케이블카까지 사람들을 산 정상으로 분별없이 옮긴다면 후각과 청각이 예민한 산양을 비롯한 야생동물은 케이블카 주변을 진저리치며 피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케이블카는 생태적일 수 없다.

케이블카가 생태적이 되려면 공사 중에 주변 생태계를 파괴하거나 위협하지 않아야 한다. 송전탑 공사처럼 공사장비와 인력을 투입하기 위한 도로 개설로 산허리를 움푹 패게 하는 방식은 곤란하다. 물론 그 이전, 케이블카가 놓일 노선에 어떤 식물상이 있고 어떤 동물이 지역을 옮겨 다니며 분포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 주변 생물상의 변화가 없는 공사를 수행할 수 있고 완공 뒤 모니터링이 가능하지 않겠나. 공사 과정에서 흙탕이 계곡으로 쓸려 내려가면 곤란하다. 수생태계가 심각하게 교란될 수 있다.

케이블카가 완성된 뒤에도 생태적이려면 할 일은 남는다. 케이블카의 최종 목적지인 정상 주변의 생태계가 교란되지 않도록 만전을 다해야 한다. 미리 생물상을 파악해 케이블카 운행 전후의 생태계 교란 정도를 모니터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를 위해 케이블카에서 내릴 이용객의 수를 조정해야 한다. 예약제가 필요할 텐데, 그런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오히려 케이블카 찬성하는 이들에게 활동비용을 제공한 설악산 주변의 상인과 기업이 누구이며 얼마를 제공했다는 소식이 들릴 따름이다. 숱한 경험을 미루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케이블카에 민주주의도 생태적 배려도 있을 수 없다.

우리 조상은 산에 오른다 하지 않고 든다고 했다. 북풍한설을 막아 주고 농사를 허용하는 물과 집을 짓게 허락하는 목재를 제공하는 것만 아니다. 묘를 정해 조상이 잠들어 있지 않은가. 그런 산에 나막신을 신고 올라도 호통을 치는 조상을 둔 우리가 거대한 철제 말뚝을 무수히 박고 산을 오르내려야 할까? 돈벌이를 위해 산에 대한 경외심을 잊은 이용객을 무작정 받을 때 산은 반드시 망가진다. 왁자지껄한 인파가 내뿜는 화장품 냄새와 술 냄새는 산짐승만 진저리치게 만드는 게 아니다. 조상님이 고개를 돌리고 말 것이다.

케이블카만 아니라 호텔까지 가능하게 한다고? 그런 호텔에서 지구온난화를 걱정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회의를 진행하면 어떻겠냐고? 농담인가? 밀렵해서 잡은 산짐승 고기를 구워 먹으며 생태계 교란을 걱정하는 모임이 더 낫겠다. 어떤 정신 나간 사람이 생태계를 짓밟은 자리에 들어선 호텔에서 환경과 생태계를 걱정할 수 있겠나?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종합할 때, 설악산 케이블카 계획은 정신 나간 사람들의 불경한 돈벌이 수단임이 명백해 보인다. 가만히 있자니 조상에게 심히 면구스럽고, 후손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 같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 환경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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