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장 피에르 아메리 감독, 2014년

▲ 영화 '마리 이야기' 중 (사진 제공 = 영화사 오드)
프랑스판 헬렌 켈러 이야기로 19세기 말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서 있었던 실화다. 시청각장애라는 불운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지성이 된 헬렌 켈러는 잘 알려져 있지만, 동시대에 살았던 프랑스의 또 다른 시청각장애 여성의 인간 승리 드라마는 우리에겐 생소하다. 앤 밴크로프트가 헬렌 켈러의 선생인 애니 설리번으로 분한 아서 펜 감독의 ‘미라클 워커(1962)’나, 헬렌 켈러 이야기를 인도 상황에 맞게 각색하고 인도의 국민배우 아미타브 밧찬이 스승으로 등장하는 볼리우드 영화 ‘블랙’은 결말을 모두 알고 있어도 이야기 전개 과정 자체가 긴장감으로 팽배하다. ‘마리 이야기’도 한 시청각장애를 가진 소녀가 스승의 도움을 통해 오랜 시련을 거쳐 단어를 알고서 세상과 자신을 자각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짧은 성장 기간을 다룬다.

눈과 귀가 먼 소녀 마리(아리아나 리부아)의 부모는 딸을 라네이 수도원에 맡기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마리의 자유로운 영혼을 알아본 마가렛 수녀(이자벨 카레)는 자신이 마리를 가르치겠다고 나선다. 하지만 누구와도 소통해 본 적 없는 마리를 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랜 고생 끝에 드디어 마리는 마가렛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지만, 마가렛 수녀의 병세는 점점 나빠져 가고 마리는 홀로 서야 한다.

장애물은 점점 더 커지고 이를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며 결국은 훌쩍 성장하는 소녀의 성장담이건만, 영화는 한 소녀의 인간 승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류가 내딛는 작은 발걸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마가렛 수녀가 마리를 위해 개발한 수화는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하니, 이 이야기는 마리 한 사람의 성장담에 그치지 않는다.

▲ 영화 '마리 이야기' 포스터 (사진 제공 = 영화사 오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은 채 살아가던 마리는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하자 언어의 의미를 추상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엄청난 지적 탐구에의 열정을 보여준다. 마리 곁에서 자신도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인내심으로 소녀의 인간적, 지적 성장을 돕는 여성 마가렛 수녀의 도전은 감동과 자극을 주기에 충분하다. 영화적 전개는 마리와 마가렛 수녀가 맺는, 밀고 당기는 대결이 주를 이루는데, 두 사람은 몸으로 벌이는 육탄전을 통해 서로 싸우고 극복하고 수용하고 사랑하기를 반복한다. 따라서 영화는 한 편의 액션영화를 보는 듯이 흥미진진하며, 두 사람이 나누는 신뢰와 애정의 과정은 감정을 순화하는 멜로드라마적 기능을 한다. 죽음과 이별에 대처하는 두 인격체의 성숙한 태도는 깊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마리와 헬렌 켈러, 마가렛 수녀와 애니 설리반 선생은 서로 꼭 닮았다. 네 사람이 살았던 시기도 매우 비슷하다. 1885년생인 마리와 1880년생인 헬렌 켈러. 마리는 평생을 수녀원에 살며 36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헬렌 켈러는 87세까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로 살았다. 하지만 절망과 시련을 딛고, 평생을 지적 탐구욕을 불태웠으며, 캄캄한 세상을 밝혀 희망을 잃은 자들에게 빛을 전하는 용기 있는 여성이라는 점에서는 꼭 같다. 그녀들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다. 가장 비천한 곳에서도 희망의 꽃은 피우게 마련이라는 교훈을 준다.

영화가 그저 그런 감동의 드라마일 것이라는 기우는 버려도 좋을 것이다. 야생의 짐승처럼 생명을 연장할 뿐이던 소녀가 보여주는 지성에 대한 열망과 개성 넘치는 당당한 태도는 인류가 가진 문화가 위대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가렛 수녀는 소녀를 하느님이 주신 사명으로 받아들이는데, 이는 영성의 힘이 발하는 긍정적 증거다.

두 여성이 나누는 영혼의 대화를 시각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진대, 프랑스 남부지역 론 알프스를 배경으로 따뜻한 색감이 살아있는 촬영술은 이들의 연대를 아름답게 표현해낸다. 연기 경험이 전무한 실제 청각장애인인 아리아나 리부아의 천재적 열연과, 아름다운 프랑스의 중견배우 이자벨 카레의 잔잔한 미소는 진정한 힐링의 순간을 선사한다.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갈 용기를 전하는 영화다. 

▲ '마리 이야기'의 한 장면 (사진 제공 = 영화사 오드)

 
 

정민아
영화평론가. 영화학 박사. 용인대학교 영화영상학과 초빙교수. 옛날 영화를 좋아하고, 사랑스러운 코미디 영화를 편애하며, 영화와 사회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합니다. 삶과 세상에 대한 사유의 도구인 영화를 함께 보고 소통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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