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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직제도가 뭔가요?[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지난번 속풀이(“가톨릭 교회는 발도파를 왜 미워했을까요?")를 다루며 언급하였던 ‘보편 사제직’이란 용어 때문인지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에 대해 알려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가성직제도에 대해 들어 보신 정도면,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해 제법 많이 알고 계신 분이 아닌가 어림해 봅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이참에 함께 한국천주교에 역사적으로 어떤 소중한 유산이 있는지 함께 확인해 보도록 하지요.

전례사전을 보면, 보편 사제직(참고로, “신부님이세요, 수사님이세요?”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과 대별되는 사제직은 직무/교계 사제직입니다. 두 종류 사제직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 직무 또는 교계 사제직은, 정도만이 아니라 본질에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그 하나하나가 각기 특수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제직에 참여하고 있다. 직무 사제는 참으로 그가 지닌 거룩한 힘으로 사제다운 백성을 모으고 다스리며, 성찬의 희생 제사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거행하고 온 백성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한다. 그리고 신자들은 자신의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하며, 여러 가지 성사를 받고 기도하고 감사를 드리며 거룩한 삶을 증언하고 극기와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제직을 수행한다.”(‘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10항)

그러니까, 평신도들의 보편 사제직과 성직자들의 직무/교계 사제직은, 하는 일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직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의미는 땅과 하늘을 연결해 주는 사람의 직분이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을 하느님께 전해 드리고 그 해결을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세례성사를 통해 (보편) 사제직을 부여받은 모든 이는 하느님께 이 땅의 일을 알리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들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18세기 말, 사회가 아무런 돌파구도 찾지 못한 채 백성들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고, 사회지도층은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일에만 급급해 하던 시기에 남인계 실학자들이 만나게 된 천주학은 실로 엄청난 사회적 대안이었으며 세계관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의 존엄함에 기초한 만민평등사상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철학으로 간주했던 것이지만, 그 안에 종교적 신념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중국교회에 이승훈을 대표로 보내서, 조선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게 합니다.

   
▲ 2011년 대전교구 사제서품식.(사진 제공 = 대전교구 홍보실)

가성직제도는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제안한 제도였습니다. 초기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중추적 인물들이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교회발전을 위한 정책을 고민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1785년에 일어난 박해 즉, 을사년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으로 김범우가 유배되어 순교하고, 교회의 주도 인물이었던 이벽이 주변의 압력으로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베이징에 가서 성직자들의 성사집행 광경을 직접 보고 온 이승훈이 한국교회에도 성직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고, 그리하여 이 제도는 초기 한국교회를 주도했던 열 명의 인물들을 통해 1786-7년 두 해 정도 실시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항검이 교리서를 자세히 연구한 결과 신부의 자격과 신부를 임명한 것이 효력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하여 큰 의심을 품게 되어 성사를 중단하고 베이징 주교에게 이 문제에 대해 문의하는 편지를 쓰기로 결정하였습니다.(가톨릭 대사전 참조)

성직자 파견이 이루어진 것은 이처럼 가성직제도가 두 해 정도 실시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성찰을 통해 얻어낸 결과였습니다. 비록 잘 모르고 벌인 일이라고는 하지만 가성직제도는 매우 멋진 기획이자 실천이었습니다. 스스로 연구를 통해 보편교회와 일치하려고 한 한국교회의 신앙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습니다. 맹목적으로가 아니라, 낯선 문화를 수용하는 데, 합리적 의심과 개방된 태도를 함께 견지했다는 점은 후손인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입니다.

작년에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이루어진 124위 시복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한국교회가 평신도를 통해 주춧돌을 놓았다는 점입니다. 일본에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중국에는 마테오 리치라는 걸출한 선교사 사제(공교롭게도 둘 다 예수회원이군요. 이들이 한국을 빠뜨리고 지나간 것이 불만이긴 하지만....)가 있었던 반면, 한국에는 진리를 목말라했던 평신도 학자들이 있었던 셈입니다. 한국 평신도 학자들과 천주교의 만남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던 한 사회가 희망을 발견한 사건이었습니다. 박해의 시간을 견뎌야 했으나, 하느님을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겪는 현실은 다시금 그 당시의 사회적 불의와 그로 인한 수많은 이들의 고통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와 매우 큰 차이가 있다면, 교회가 기득권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18세기 후반, 사회적 대안을 고민하던 사람들이 희망의 믿음을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그 신앙의 후예들을 자처하는 몇몇은 기득권을 지키고자 현실에 눈을 감아 버리기까지 합니다. 당혹스런 태도입니다. 우리가 박해받았다는 것은 광고용 포장이고, 더 이상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것이 본심입니다.

가난한 교회, 겸손한 교회는 세계화의 거대한 움직임 속에서 박해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처한 어려움은 우리가 품어 안아야 할 이들이 세상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기에 생겨납니다. 일정한 테두리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고, 오늘의 교회는 그들을 찾아 거리로 나섭니다. 예전에는 (가성직제도를 통해) 없는 목자를 만들어서라도 교회를 이끌어야 했다면, 이제는 깨어 있는 신자들을 찾아 연대하고, 잠들어 있는 신자들을 깨워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말해야겠습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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