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고백소에서 종종 듣게 되는 고백들 중에 낯설지 않은 몇 가지 사연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동생에게 돈을 빌려 줬는데 갚지를 않아서 동생을 원망하고 있다", "피곤해서 잠자다가 주일미사 참례를 못했다", "한창 일할 나이에 우울증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 칩거하는 아들이 집을 나가 줬으면 했다"는 고백, "사랑하면 안 될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사고로 아이를 잃었는데 내가 맛있는 거 먹고, 친구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사연 등등이 있습니다.

▲ 인천의 한 본당에서 판공성사를 보고 있는 모습. ⓒ지금여기 자료사진
설마 고백의 비밀을 공개하고 있다고 오해하시는 것은 아니죠? 이런 상황들은 사실상 나 자신이나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일 수 있고, 정확히 누구의 고백인지를 밝히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냥 오늘 속풀이를 위한 예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아무튼 위에 제시한 예들은 일단 표면적인 정서로 본다면, 미움, 후회 혹은 자책, 우울감, 안타까움, 미안함 등이지만 잘 뜯어보면, 죄책감과 일정 부분 연결되어 있습니다. '형제끼리 그래서는 안 되는데....' '알람이라도 맞춰 놓고 잠들었으면.... 멍청이같으니라고....' '내가 낳은 아들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금지된 사랑에 매달리는 나는 악한 건가?' '먼저 간 아이를 두고 내가 이럴 수 있나?'

긍정적으로 보면, 죄책감은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해 주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책감은 무엇보다 양심이 작용하여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미리 알도록 해 줍니다.

죄책감을 갖도록 하는 양심은,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해서 상처를 준다면, 나도 마음에 상처를 입으리라는 예측을 하도록 해 줍니다. 이것은 개인의 직간접적인 경험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에 가능합니다. 예측보다 좀 더 강하게는 나쁜 일을 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불안심리가 따라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죄책감이란 것은 일을 망쳐 놓고 나서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전에 죄책감을 느낄 것이 예상되므로 하지 말았어야 하지만 유혹을 못 이겼거나 신중하게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하여 실수를 범하게 되면 죄책감이 밀려옵니다.

이때 실수를 범한 '나'를 탓하는 데 초점이 맞춰지면 수치심이나 당황스런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반면에 저지른 일에 초점이 맞춰지면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고 심리학자들은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수치심과 죄책감은 복합적으로 겹치는 감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내 마음이 돌처럼 굳어 있지 않다는 걸 설명합니다. 건강한 양심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해 줍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이 장기화되는 것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양심이 살아 있음에 감사드리는 데서 그치고 나의 부족함에 대해 겸손한 마음을 되찾는 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지난 실수를 피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성찰을 해 보는 것이 중요한 작업입니다.

수치심이나 죄책감이 장기화 되면, '나'를 탓하는 모양새(수치심)는 결국 무가치한 자아로 나를 몰아갑니다. 사는 의미를 잃게 될 가능성이 높고, 자기 존중감은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됩니다. 저지른 일에 초점을 맞추는 죄책감은 자칫하면 나를 너무 세심(細心, 세심에 관해서는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영신수련”, 345-348 번 참조)하게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심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닌데도 죄를 저질렀다고 믿도록 합니다. 우연히 십자가 모양으로 자란 잔디를 밟고 지나간 것을 가지고 죄지었다고 혼자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경우 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런 경우는 오류이지 죄가 아니라고 정리합니다.

하지만, 다른 양상의 세심이 있습니다. 십자 모양 잔디를 밟고 나서 이러 저런 일을 하고 이야기도 하는 과정에서 불현듯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는 의심이 듭니다. 이런 세심은 나쁜 영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사람이 지닌 맑은 영혼을 반증해 줍니다. 어떤 형태의 죄로부터도 멀리하게 하여 그 영혼을 대단히 정화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선량하기에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잘못을 보도록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나쁜 영의 유혹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를 범하지 않으려 애쓴다면, 나쁜 영은 그가 그릇된 죄책감을 가지게 함으로서 영혼을 혼란에 빠뜨리려 합니다. 반면 무딘 영혼은 계속 무디게 만듭니다.

그러니 무뎌지려는 영혼은 좀 더 세심해 지려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며, 너무 세심한 영혼은 심약해지지 않도록 마음의 평정을 찾으려 애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온전치 못한 존재임을 겸손하게 고백하고, 그럼에도 하느님께서 자비로 나를 지켜 주고 계심에 감사드리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머물러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운영실무.
서강대 "성찰과 성장" 과목 담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