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룩소르의 신전

십여 년 전 성지 순례를 하던 중 이집트의 룩소르라는 고대 도시를 방문했다. 거대한 종교 유적지도 방문하였다. 나는 거대한 돌기둥 수십 개로 장식되어 있는 고대 성전의 흔적을 구경했다. 대다수의 사람은 엄청난 규모의 성전의 흔적을 보면서 놀라워하고 감탄하였다. 사실 그랬다. 그 흔적들은 얼마나 웅장하던지! 우리 모두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그 순간 성전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내 마음에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이 몰려왔다. "이 거대한 성전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어야 했을까? 얼마나 많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죽어 가야만 했을까? 나는 거대한 성전의 흔적들을 바라보면서 그 거대함에 압도당하기 전에 그 속에 스며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고통이 되살아나면서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희생과 고난이 그들이 믿는 신들의 황제의 이름으로 이루어졌음을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 끝에 또 다른 질문이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믿는 신을 찬양하고 숭배하기 위하여 건축된 거대한 성전들, 과연 그 성전들의 위용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신은 기뻐했을까?" "그 신들은 자신을 위해 세워지고 바쳐진 성전의 위용을 바라보면서 흐뭇해했을까?"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사람들은 그러한 신을 진정으로 존경하고 또 그 신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감당했을까?"라는 질문이 생겼다. "나라면 거대한 성전을 지어 바칠 것을 요구하는 신,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아랑곳하지 않는 신을 섬길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과연 우리의 신은 우리의 희생을 거침없이 요구하는 신일까? 희생을 요구하는 신! 자신을 섬기는 데 인간의 목숨까지 요구하는 신! 그 신은 생명의 신인가, 혹은 죽음의 신인가? 우리는 오늘 어떤 신을 믿고 있는 것인가?

▲ 룩소르의 사원.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어떤 신을 믿고 있는가?

서구 신학은 신에 대해 말하면서 주로 그의 존재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여 왔다. 신의 존재 양식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다. 어쩌면 서구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처럼 신의 존재에 관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의 존재와 그에 대한 증명과 확신은 서구 신학에서는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가 됐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신의 부재라는 주제도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과제로 등장한다.

신의 존재와 부재!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의 신학은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강제수용소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어 가고 있는데 하느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요즘의 시대에서 어떤 형태로 신을 믿을 수 있는가?" 등의 주제가 관심을 끌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라틴아메리카 신학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의 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매우 전통적이다. 그들은 삶의 고난 속에서도 설명할 수 없는 박해와 가난한 삶의 현장 가운데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을 간직한다.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억압적인 정권들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군사독재 정권에서 자행됐던 수많은 박해, 납치, 불법감금, 인권유린, 고문과 살해 등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곤 했다는 사실이다. 억압 정권의 최고 권력자들은 매 주일 미사에 참석하고 지역의 추기경과 주교와 사귀었고 그들로부터 훌륭하고 고귀한 가톨릭 신자임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존재와 부재의 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신의 존재와 부재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신학적으로 그다지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면 라틴아메리카 신학, 다시 말하면 해방신학은 신에 대하여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까?

혼 소브리노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theo-logia)은 신(Theo)에 대하여 말하는(Logia)것이다. 그럼에도 서구 신학자들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은 '신'(Theo)에 대하여 말하는 것보다는 '신학'(theologia)에 대하여 더 많이 말을 한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그들의 글에서 '하느님'에 대한 언급보다는 다른 '신학자'들에 대한 언급이 더 많음을 보고 있다. 신학은 '신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에 대하여 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신의 존재 혹은 부재에 대한 관심보다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는가?"에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하느님의 존재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내용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하느님의 존재 양식 혹은 부재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적 존재로서, 인간의 역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과 그 현존의 내용에 대하여 묻고 있는 것이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매우 독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가난한 자들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체험한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 그것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들의 삶의 현장 한복판에서 하느님을 만난다. 그리고 이러한 현장에서의 경험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그러므로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 혹은 부재가 아니라 우상 숭배의 문제다.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어떤 신(하느님)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생명의 하느님을 믿고 있느냐 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섬기고 화려한 성전을 짓고 체제의 안정을 추구하는 죽음의 신(하느님)을 믿느냐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하느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고 체험한 생명의 하느님은 해방신학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하느님을 말하도록 했다.

첫째는 편파적인 하느님이다.(Partial God)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이라고 알고 있다. 공평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적인 입장(Neutral)으로 이해됐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은 하느님의 공평을 철학적인 개념을 넘어서서 사회학적이며 프락시스(Praxis, 사고와 병행하는 행위)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공평은 단순한 중립적인 위치를 뛰어넘어야 한다.

사회적이고 프락시스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는 공평은 오히려 편파적이다. 하느님의 공평하심은 그가 가난하고 약하고 그리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 있음으로써 진정한 공평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편파성에서 출발하는 공평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죽음의 하느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임을 보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생명의 편에 서 있는 분이시다. 해방신학의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들이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혹은 죽음이 자신의 백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공평의 하느님이 아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 억눌린 사람 그리고 소외된 사람의 편에 서시는 편파성을 통하여 온전한 공평을 이루어 내고 있다,

두 번째로 해방신학이 경험한 하느님은 무감각의 하느님(apathetic God)을 넘어서는 열정적인 하느님(passionate God)이다. 자신의 백성의 고통과 고난의 삶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서 팔짱을 낀 채 바라만 보고 있지 않는다. 해방신학의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울고 웃고 분노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 열정의 하느님이다. 예수의 성육신(육화)도 이 같은 하느님의 열정으로부터 이해된다. 하느님은 이집트에서 울부짖는 백성들의 외침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고 그들의 신음소리에 열정적으로 응답한다. 하느님은 직접 백성들의 삶의 한복판에 와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신다. 구름과 불기둥으로 함께 함으로써 자신이 무감각의 신이 아니라 열정의 하느님임을 보여 준다.

무신론을 넘어서

요즘의 신앙의 문제는 신의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신의 존재나 혹은 부재는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신을 믿고 있느냐다. 다시 말하자면 우상 숭배의 문제라는 것이다. 맘몬이라는 거짓 신을 믿고 있느냐 혹은 생명의 하느님을 믿고 있느냐가 우리의 관심이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신을 믿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런 면에서 가난한 사람을 향한 우선적 선택을 주장하는 해방신학은 분명한 어조로 말한다. "우리는 우리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죽음의 신, 맘몬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 풍요로운 생명을 주시는 생명의 하느님, 편파적 하느님과 열정의 하느님을 믿는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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