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해방신학자는  마르크스주의자인가?

수년 전의 일이다. 어느 교회와 담임목사 청빙과 관련한 면담을 하게 되었다. 교회의 대표 몇 분과 거의 마지막 단계의 면담을 하고 있었다. 청빙 단계의 마지막 수순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가난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그들을 돌보는 목회를 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렇게 하겠노라는 답변을 했다. 만족해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뒤에 한 분이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해방신학을 하셨네요?" 그리고 해방신학을 한 이유에 대하여 설명을 요구하였다. 나는 이에 대하여 바로 해방신학이 나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로부터 출발하는 신학과 목회를 전개하도록 했다고 설명하였다. 그 뒤 나는 해당 교회 담임목사 청빙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분들에게는 해방신학은 마르스크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이었고 따라서 그 신학을 공부하거나 따르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은 일반인, 특히 보수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마르스크주의와 동의어로 간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방신학에서 마르스크주의라는 것은 어쩌면 주홍글씨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대체적으로 해방신학은 공산주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극한 경우에는 무신론적인 신학이라는 비판도 존재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런데 과연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와 동의어로 간주될 만큼 마르크스주의적인가?

해방신학자의 마르스크주의 사용에 대하여

▲ 독일의 정치, 경제,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1818-1883).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그러나 실질적으로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의 저서에서 마르스크주의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해방신학과 마르스크주의의 관련성 여부 정도는 많은 해방신학자들이 마르스크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고 또 그에 대하여 광범위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하는 지식적 그리고 교육적 차원의 관계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많은 해방신학자들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신학을 전개하는데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적인 이론적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후안 루이스 세군도)

혼 소브리노의 경우를 들어보자. 800쪽이 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한 그의 저서 가운데 마르크스를 단지 9번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9번의 마르크스에 대한 언급 말고는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해 누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요 해방신학자에게 마르크스주의는 매우 단편적인 의미의 언급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르스크주의가 해방신학의 전개에 있어서 이론적인 기초를 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반증한다. 오히려 해방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와 언급은 성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구티에레스의 경우에도 그의 초기 작품인 "해방신학"에서 마르크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외의 저서에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하기 위해서 마르크스를 인용하거나 그에 대한 언급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도 해방신학의 이론적 기초가 마르스크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그럼에도 해방신학의 전개에서 마르스크주의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해방신학자들은 그들의 신학 전개에서 마르스크주의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가 오늘 우리의 관심사가 된다. 먼저,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변화를 원하고 또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마르스크주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용한 이론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한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적 사회분석은 마치 엑스레이로 한 사회를 촬영하여 관찰하는 것과 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변혁가들에게 마르크스적 사회분석은 자신들이 처해 있는 사회의 현실을 가장 현실적으로 그리고 가장 뚜렷하고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스크주의가 이데올로기적인 도구가 아니라 사회현실에 대한 '질문-답변-새로운 질문의 대두'라는 순환구조를 창출해 내는 하나의 사회분석 방법론으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마르스크주의가 해방신학의 전개에서 사회분석 방법론적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현실에 대한 정세적 분석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변혁가들은 상황에 대한 정세적 분석을 시도함으로써 변혁을 향한 자신들의 구체적인 행위와 행동의 유형을 결정하고자 한다. 상황에 대한 정세 분석은 그들의 현실이 처해 있는 사회적, 경제적, 군사적, 심리적, 문화적 구조와 현황에 대한 분석과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이들은 사회변혁을 위한 현재의 행동이 어떤 형태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해방신학은 라틴아메리카의 변혁을 향한 요구 앞에서 교회로서 어떠한 행동, 다시 말하면 성명을 발표할 것인지, 혹은 그 어떤 다른 구체적인 행동을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마르크스의 사회 분석이론이 방법론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해방신학의 사회변혁을 향한 행동의 유형을 일괄적으로 그리고 일반화 하여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상황의 정세적 분석을 통하여 교회는 각자의 상황에서 구체적인 행동을 주체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해방신학자들이 무장투쟁을 한다거나 폭력적인 사회 혁명을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은 근거 없는 것이다. 한 지역에서 발생한 어떤 행동을 통하여 해방신학을 전체적으로 매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방신학의 행동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깊은 정세적 분석과 성찰에 의해 결정되는 매우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해방신학은 마르스크주의와 직접적 관련을 갖고 있지 않다는 의외의 사실에 우리는 모두 놀란다.(물론 1978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문서는 예외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해방신학들은 마르스크주의의 직접적인 언급이나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태도에서 연유될지도 모르겠다.(좌파 혹은 공산주의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에게 성찰 없이 조건반사적인 거부를 유발시킨다는 현실을 감안한) 그럼에도 마르스크주의에 대한 언급이 주를 이루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해방신학은 사회이론이 아니라 신학이기 때문이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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