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식 목사의 해방신학 이야기]

해방신학에 대한 오해

해방신학에 대한 오해 중의 가장 큰 오해는 아마도 마르크스주의와의 관련성일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공산혁명을 꿈꾸는 과격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해방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해서 출발된 신학인가? 그리고 해방신학은 계급 혁명을 꿈꾸면서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일까?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해방신학이 마르크스주의를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설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전에 해방신학을 향한 마르크스주의와 관련된 오해와 더불어 또 다른 의미의 오해가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해방신학과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를 기술하기 이전에 해방신학에 대한 오해에 대해 몇 가지 해명을 하고자 한다. 해방신학에는 3가지가 없고 3가지가 있다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1. 예수가 없고 마르크스만 있다. 2. 성서가 없고 마르크스의 자본론만 있다. 3. 교회가 없고 프롤레타리아 사회만 있다고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을 좀 더 깊은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고 연구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는 사람이 꽤 많이 생긴다.

1. 예수가 없다?

대개의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철저히 예수의 삶을 본받고 따르며 그렇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임을 발견한다. 얼마전 시복된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가 그랬고 그 외 수많은 순교자들과 그리고 현존하는 해방신학자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예수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나는 지난 2014년 NCCK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선교훈련원(당시 원장 이근복 목사)이 주최한 에큐메니칼 신학생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 12명과 함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여 해방신학의 현장을 방문 인솔했던 경험이 있다.우리 일행이 처음 방문 한 곳은 브라질 상파울로 근교에 있는 자르징안젤라(천사의 정원)시 ‘거룩한 순교자’라는 이름의 교회였다. 1960년대 말부터 성직자들이 아무도 돌보지 않는 빈민촌으로 들어가 설립해 해방신학의 실천 현장이 된 기초공동체 중 하나이기도 하다.

▲ 1982년의 에바리스투 아릉스 추기경.(사진 출처 = en.wikipedia.org)
이 교회의 사제는 아일랜드 출신 자이메 크로우(69) 신부다. 그는 1969년 브라질에 왔다. 자이메 신부는 당시 ‘희망의 추기경’으로 불린 상파울루대교구장 에바리스투 아릉스 추기경이 “교회가 기초공동체, 인권, 노동, 빈민 사목 4가지를 우선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 뜻에 동참해 이곳에 왔다라고 말했다. 당시 이 지역은 연간 10만 명당 120명이 살해돼 전 세계에서 살인율이 1위인 지역이었다.  그러나 자이메 신부는 이 빈민촌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가톨릭을 넘어 루터회,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 장로교 등 개신교 교회들과 손잡고 지역문제를 해결했다. 이 지역에서만 기초공동체가 16개로 늘었고, 공동체에선 성서를 함께 읽고 재봉과 제빵, 미용 등 기술을 가르치고 심리치료를 해갔다. 

 “이제 살인율은 10만명당 25명으로 낮아졌어요. 2008년엔 250병상 규모의 시립병원이 세워졌지요”라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표정으로 수줍게 말하는 자이메 신부의 주름진 얼굴에 옅은 햇살이 비친다. 느리지만 가느다란 희망을 그와 빈민들이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한겨레 조현 기자의 '해방신학 현장을 가다' 요약 2014.2.25 한겨레 신문) 아직도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는 자이메 신부의 모습에서 우리는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이메 신부뿐만 아니다. 대다수의 해방신학자들은 오늘도 현장을 지키며 예수가 그렇게 사랑했던 가난한 사람들을 떠나지 않고 그들 가운데서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며 예수처럼 살기 위해 힘쓰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에게 예수가 없었다면 오늘 그들이 지금도 그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2. 성서가 없다?

해방신학은 성서를 중심으로 하거나 출발점으로 삼는 신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종종 듣곤 한다. 해방신학의 신학적 공헌 중에서 중요한 것은 신학과 사회학을 연결시켰다는 데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주로 사변적인 철학에만 치중되어 있던 기존의 영미와 유럽 등 서구신학의 영향을 넘어서서 사회학과의 연관에서 신학을 전개하는 시도를 실천적으로 실행했던 것이 해방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분석, 파악하고 그러한 현실의 경험 속에서 성서해석학을 시도했던 해방신학의 공헌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해방신학의 전개에서 사회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해방신학의 전개에서 성서가 주변자리로 물러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가톨릭 전통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것은 그들이 성서적인 전통 속에서 그의 삶과 학문을 전개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각기 수도회(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에 속해 있으면서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삶에 익숙해 있었고 기도와 영성에 힘쓰는 매우 영성적인 전통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몸에는 이미 수도원적 영성과 성서의 전통이 깊이 뿌리박혀 흐르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이 저술한 저서들을 살펴보라. 얼마나 많은 성서적 참조와 주해가 깃들어 있는지! 그 성서적 전통의 풍요로움은 우리를 놀라게 할 뿐이다.

해방신학이 사회학적 접근, 특히 막스적 사회분석방법과 깊숙한 관련을 맺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현장에서의 성서이해와 해석에 실천적인 깊이를 더해 줄 뿐이지 성서자체를 뒷전으로 물러가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해방신학자들의 저서를 "성서가 없다"라는 편견을 뒤로하고 주의 깊게 살펴보라. 성서, 하느님 말씀의 깊이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만일 해방신학자들에게서 성서가 없었다면 그 수많은 박해, 압력을 견딜 힘을 어디서 찾을 수 있었겠는가?

3.교회가 없다?

세번째 오해는 교회에 관한 것이다. 해방신학에는 교회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해방신학적 목회를 하면 교회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있음을 본다. 나의 경우에도 해방신학이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다니는 탓에 교회의 목회 자리를 구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살았을 때의 일이다. 제법 규모가 큰 교회가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해서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얼마 뒤에 "해방신학을 하는 사람이 담임목사로 갔으니 그 교회는 이제 신도 숫자가 줄고 망해 갈 것이다."라는 소문이 났다. 해방신학은 교회를 없애는 신학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생각해 보자. 브라질의 기초공동체를 생각해 보자. 기초공동체는 해방신학의 교회론을 가장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브라질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가톨릭교회는 해방신학에서 시작된 기초공동체가 없었다면 큰 위기를 당했을 것이 틀림없다. 기초공동체는 위기에 처한 가톨릭교회에 교회론적인 대안을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론적인 희망도 불어 넣어 주었다. 해방신학이 교회를 없애는 신학인가? 아니다. 오늘과 같이 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잃어버리고 위기로 치닫는 현실에서 해방신학적 목회는 교회를 살리는 신학적 그리고 목회적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서구적인 공적 신학을 넘어서서 근본적인 의미에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게 만들 것이다. 해방신학이 아직도 생명을 이어 가고 있는 것은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해방신학과 교회에 대해서는 기초공동체 편에서 더 자세히 언급하려고 한다.
 

홍인식 목사
파라과이 국립아순시온대학 경영학과 졸업. 장로회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졸업 M. DIV.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에서 호세 미게스 보니노 박사 지도로 해방신학으로 신학박사 취득.
아르헨티나 연합신학대학 교수 역임. 쿠바 개신교신학대학 교수 역임.
현재 멕시코 장로교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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