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7월 12일(연중 제15주일) 마르 6,7-13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뒤,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배워 실천하여,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하면서 기록하여 문서로 남긴 것이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40년 뒤, 서기 7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초창기 신앙공동체의 상황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당부하신 말씀이라고 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실제로 하신 말씀도 있고, 또한 초기 신앙인들의 활동 상황과 그들의 마음다짐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택하여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겪고, 실망하여 흩어져 각자 자기의 생업으로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신다는 사실을 각자 체험하면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바를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유대교의 율사와 사제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과 신분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지며,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조직과 제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하여 경직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우월감도, 그런 경직성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진정으로 원한 것, 자유롭고  겸손하게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런 우월감이나, 경직성 없이,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로이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는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고, 서로를 섬깁니다. 그 섬김은 서로의 발을 씻어 주기까지 하는 겸손한 것이기를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신비스런 지배권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제자들의 역할이 인간을 지배하는 나쁜 힘, 곧 더러운 영들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 아레초에서 악령 쫓아내기, 조토 디본도네.(1297)

인간 안에 어떤 무질서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은 쉽게 ‘더러운 영’ 혹은 ‘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사회적 무질서는 ‘더러운 영’의 조화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복음 선포는 그런 무질서의 해악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기적이 회당에서 정신병자를 고친 일이었다고 말하면서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도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옷도 두 벌은 껴 입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벼운 몸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사실 그 시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들보다 더 가벼운 차림으로 다닐 것을 원하였습니다. 가지고 다니는 짐이나 옷차림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에 남의 눈에 띄는 복장을 하고, 불편에 대비하여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섬기는 사람다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닌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은 얼마든지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가정집 공동체였습니다. 신자들 중 넓은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집을 공동체의 집회 장소로 제공하고, 그런 집을 중심으로 신앙 공동체가 발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집 하나가 집회 장소로 정해지면, 모두 그 집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그 지역 신앙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오로 사도의 편지들을 보면, 제자들이 선교 여행 중 거점으로 정한 곳은 가정 교회라고 부를 수 있는 개인의 집이었습니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것이 복음 전파

오늘 복음은 신앙공동체의 특수 계층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선교는 어느 신분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인은 복음을 충실히 살며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과 옷차림에 구애받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신체적 혹은 사회적 무질서의 해악에서 자유로워지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인류 사회는 조직에 있어서 유연함을 추구합니다. 제국주의, 봉건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보다 더 유연한 것이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오늘 민주주의 사회는 자발적 시민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더 큰 유연함을 향한 행보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는, 더 유연한 조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통신 매체들은 사람들 모두가 정보를 쉽게 공유하게 해 줍니다.

세상은 상호 의사소통이 원활하고,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개방하고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과 단체가 실효성을 지닙니다. 경직된 개인이나 집단은 고립되고, 실효성이 떨어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유럽 교회가 신앙인들로부터 외면당한 것은 성직자 중심의 경직된 중세적 조직을 교회가 고수한 데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 주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의 삶 안에 되살려 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갱신을 하자고 개최된 것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언어와 옷차림과 제도적 경직성을 벗어 던지고,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람들 안에 하느님이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 계시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관을 쓰고, 거창하게 입고, 권위주의적 언어로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함께 토의하며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섬기는 유연한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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