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6월 7일(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마르 14,12-16.22-26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은 수난 전날 저녁, 제자들과 함께 해방절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과 이별의 최후만찬이 되었습니다. 해방절은 이스라엘이 그 역사 초기에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사실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축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 지닌 의미를 오늘의 삶 안에 되살려 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상을 위한 제사에서 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제사에서 우리가 돌아가신 어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분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분들이 아끼고 사랑하신 후손인 우리형제자매들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깁니다. 제사 뒤 음복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기억한 조상들의 시선으로 형제자매들을 바라보고, 그들을 위한 우리의 사랑을 새롭게 합니다. 돌아가셔서 과거의 존재가 된 분들이 오늘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제사입니다.

▲ 사도들의 영성체, 후세페 데 리베라. (1651)
해방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고, 그들의 삶 안에 되살려 내는 의미는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과, 그 함께 계심은 이집트 종살이에서의 해방과 같이 그들에게 은혜로운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신 최후만찬이 해방절 식사였던 것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의 삶 안에 되살려낸 예수님이었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제자들이 하느님이 주시는 해방과 은혜로움을 깨달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만찬 식탁에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주 잔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후,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면서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빵을 받아먹고 그 포도주를 받아 마셔서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몸과 같은 피가 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내 계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계약은 계약 쌍방이 미래의 행동 방식을 약속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신 빵을 먹게 하고,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신 포도주를 마시게 하면서, 쌍방의 미래 행동 방식을 정하십니다. 그 빵을 먹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 안에 예수님이 몸과 피로 살아 계셔서 당신의 삶이 그들 안에 발생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몸이라는 단어는 인간관계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입니다. 그 빵을 먹고 그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예수님이 지녔던 인간관계와 그분의 생명을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 만찬으로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미래를 위한 행동방식이 정해졌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모든 사람을 형제자매로 생각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라는 오늘의 말씀이 그 사실을 요약합니다. 자비와 사랑을 위해 스스로를 내어 주신 그 생명을 우리도 살겠다는 약속이 담긴 성체성사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 사회의 실세였던 사제와 율사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특권을 받았다고 믿으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죄인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아버지이십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에게나 잘못 지키는 사람에게나 하느님은 자비로우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유대교의 제도권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하느님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자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3.45). 그 시대 사제와 율사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면서 그들 자신의 위신과 명예를 찾고, 그들의 욕심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일은 달랐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아들 되어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생명을 사는 사람이 갖는 인간관계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강요하던 십일조와 제물 봉헌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을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도 사랑으로 자유롭게 응답할 것을 기대합니다. 군림하고,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은 횡포지 사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에게 베푸십니다. 그분은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베푸는 일을 자유롭게 실천할 것을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기득권자들이 하듯이, 당신의 위신을 찾고, 당신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켰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유대교 기득권층으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힐 위험이 다분히 있는 일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처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에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죄인과 세리와 어울리시기에 사람들로부터 비난받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죄인이라 낙인찍은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하느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당신의 몸짓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와서 나를 따르시오”(마르 10,21)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이 재물이든, 위신이든, 베풀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성찬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몸이라는 빵을 먹고, 그분의 피라는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우리의 인간관계와 우리의 삶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성찬에서 변하는 것은 빵과 포도주만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보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집니다. 빵이 예수님의 몸이 되고, 포도주가 그분의 피가 되었듯이, 우리 자신도 내어주고 쏟는 사람이 됩니다. 이 변화는 한 순간에 기적적으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생명은 한 순간에 자라고 한 순간에 무엇을 배우지 못합니다. 생명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성장하고, 서서히 무엇을 습득합니다. 우리는 성찬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시간과 더불어 이 변화가 우리 안에도 일어날 것을 빕니다. 우리 자신만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서서히 실현되게 하는 성찬입니다. 성찬은 빵도, 포도주도, 우리 자신도 모두 변하게 하는 하느님의 일, 곧 성사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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