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6월 28일(연중 제13주일) 마르 5.21-43

복음서에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복음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를 위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 2000년 전 팔레스티나 혹은 로마제국 영토에 살던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에는 그 시대 그 지역 사람들이 가졌던 교양, 지식, 편견 등이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기적은 자연법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람들에게 기적은 자연법과 관계없이, 놀랍고 은혜로워서 하느님이 하신 일로 보이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세상도 하느님이 주신 놀랍고 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세상도 하느님이 하신 기적이었습니다. 아침에 동쪽 하늘에서 해가 뜨는 것도 기적이고, 사람이 살아 있는 것도 기적이었습니다.

과학은 대자연의 신비를 하나씩 벗겨 가고 있습니다. 과학은 우주 공간도 정복하여 우주에 대해 많은 정보를 주었습니다. 과학이 인간 유전자를 해독하여 사람의 성격과 장차 발생할 병까지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날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는 알 수 없는 신비라고 생각하던 것들을 오늘 우리는 알아 가고 있습니다. 신비스런 것이 없어진, 오늘 현대인의 삶입니다. 현대인은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그것을 신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은 우리가 아직은 모르지만, 장차 그것을 이해하고 설명할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합니다.

기적 이야기를 전하는 의도, 하느님이 놀랍고 은혜로운 일을 하셨다

성서가 기적 이야기를 전하는 것은 하느님이 하신 놀랍고, 은혜로운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인은 이야기 하나를 들으면, 그것이 실제 있었던 사실인지를 먼저 묻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그 안에 담아 전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성서에는 실제 있었던 역사적 사실도 기록되어 있지만, 그 시대 신앙인들이 체험하고, 믿던 바도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읽은 사람도 같은 믿음에 동참하라는 것입니다.

▲ 하혈하는 여인을 치유하는 그리스도, 로마의 지하무덤에 그려진 그림.
이번 주일 우리가 듣는 복음에는 두 개의 기적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12년 동안 병을 앓았다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을 만나 치유된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소생한 이야기입니다. 첫 번 이야기의 부인은 병을 고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끝났습니다. 찾아다닌 의사들도, 가졌던 재물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병은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그 부인은 예수님에 대해 소문을 들은 바가 있어, 그분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그는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하자 과연 병은 나았고, 예수님의 시선이 그에게로 왔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모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엎드려 모든 것을 말씀 드린’ 것은 경신(敬神)행위를 하였다는 말이고, ‘딸아’라는 말은 하느님이 여인을 부를 때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에게 접근하는 신앙인이 지녀야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혹은 가진 재물에서 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해서 얻는 구원입니다. 오늘의 여인은 예수님에게 접근하면서 그분 안에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았습니다. 많은 군중이 있어 예수님에게 접근하기 힘들었지만, 그 여인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예수님 앞으로 나아갔고, 예수님의 시선이 그에게 와 닿았습니다. 그것이 구원이었습니다. 사람은 예수님에게 접근하여,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일을 보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약자에게 시선 주고, 고치고 살리는 일

오늘 복음의 두 번째 기적은 예수님이 죽은 소녀를 살린 이야기입니다. 오늘 두 개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알리는 것은 예수님은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행해서 사람들을 당신에게 끌어 모으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초능력을 과시하여 사람들에게 믿음을 강요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접근하는 약자에게 시선을 주고,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행하셨습니다.

오늘 두 개의 기적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 구원을 기대하고 접근하여, 그분 안에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듣고,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기적으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은 말합니다. “냉큼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 27,42).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하면 믿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예수님을 기적으로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현대인은 병들었을 때 기적에 호소하지도 않고, 죽은 이를 하느님이 기적으로 살려낸다고 믿지도 않습니다. 병을 고치고 사람을 살리는 인간의 노력 뒤에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고치고 살리는 하느님의 일을 자기 능력에 따라 실천합니다. 그 실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신앙은 자유로운 인간이 하는 결단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워, 혹은 기적에 놀라서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자연법의 질서 안에 일어나는 일이라도 생명을 고치고 살리는 일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웃을 돌보아 주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이웃을 위해 하는 우리의 헌신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은혜로운 기적입니다.

재물에 목숨을 걸고, 그것을 조금 더 갖기 위해 이웃을 속이고, 해치기까지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웃을 위해 스스로 가난한 자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복음 말씀을 따라 살며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지위와 권력을 얻어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살고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들을 돌보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내어 자기 한 몸 편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기가 가진 것을 무상으로 제공하며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일, 곧 기적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로운 일이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우리에게서도 은혜로운 일이 발생합니다.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들은 우리도 그 놀라움과 은혜로움을 실천하라고 초대합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고,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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