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6월 14일(연중 제11주일 ) 마르 4,26-3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두 개의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와 같습니다. 씨를 뿌려 놓으면,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듯이, 하느님의 나라도 사람들에게 선포되면, 그들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라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땅에 뿌려질 때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이 그것을 수용할 때는 보잘것없지만,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성장하여 자리 잡으면, 주변의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 농번기와 수확, 그랜트 우드.(1937)

율사와 사제가 생기자 하느님을 잊다

예수님 시대 유대교가 가르치던 것은 율법을 지키고, 성전이 요구하는 제물 봉헌에 충실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본시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그 함께 계심을 살기 위한 생활지침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 준수를 담당하는 율사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율법의 조항들은 늘어나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율사들이 행세하자, 사람들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율법 지키기에만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제물 봉헌이 생긴 것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의식하며 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노동하여 얻은 수확의 맏물을 성전에 봉헌하면, 하느님의 시선이 그 위에 내려옵니다. 자기 노동의 산물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겠다고 마음다짐 하는 제물 봉헌 의례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면, 자기가 거둔 수확은 하느님이 은혜롭게 베푸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롭다고 의식한 사람은 그것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웃과 나누면서, 함께 기뻐하고 하느님에게 함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제물 봉헌도 그 일을 전담하는 사제들이 행세하면서 하느님은 은폐되고, 많이 바치면, 많은 축복을 받는 장치로 전락하였습니다.

이렇게 율사와 사제라는 직업이 등장하여 행세하면서, 이스라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지켜야 하는 율법과 바쳐야 하는 제물봉헌에 시달렸습니다. 하느님의 은혜로움도 잊어버리고, 기쁨도 모르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율사와 사제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율사와 사제들은 병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불행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준수하지 못하고, 제물 봉헌에 충실하지 못한 죄의 대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그런 벌을 주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고, 죄의 용서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이, 하느님이 조건 없이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이 어느 안식일에 벳싸다 못가에서 38년 동안 앓아온 사람을 고친 후, 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지금도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5,17) 아버지가 고치고 살리는 분이라 당신도 고치고 살리는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마르코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두 개의 비유 말씀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자라고, 그것이 자라면, 주변에 은혜로운 혜택을 준다고 말합니다. 뿌려진 씨는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합니다. 그리고 땅은 씨를 뿌린 사람이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그들에게 남기셨다고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예수님이 사람들 안에 뿌린 씨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또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사람들 안에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사람들이 그것을 수확하여 혜택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랑은 주변의 모든 사람과 하늘의 새까지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루카 6,20-21)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 사랑에 충실하기 위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되기를 주저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도 가르쳤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의 말씀입니다. “알다시피 민족들을 다스린다는 자들은 그들 위에 왕 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그들을 내리누릅니다. 그러나 그대들 사이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42-43) 우리 안에 자라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으로 섬김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백성에게 환기시키기 위해 생긴 것이 율사와 사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이 섬김을 잊어버리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였을 때,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은폐되고, 지켜야 하는 율법과 바쳐야 하는 제물 봉헌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느님은 인간을 벌하는 분, 곧 인간 불행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남긴 것, 사랑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요한 17,9)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을 신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사람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고, 그 신뢰를 살았던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한 복장을 하지도 않았고, 존경스런 호칭을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섬기는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뿌리지만,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고, 하느님이 비옥하게 만드시는 땅입니다. 우리가 행세하고, 우리의 독선과 횡포가 작용하면, 사람들은 모두 불행해집니다.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는 하느님 나라의 씨앗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씨앗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사랑을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1고린 13,4-5). 우리가 뿌려야 하는 씨앗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그런 씨앗입니다. 참고 기다리며, 성을 내지도 않고, 비난하거나 성토하지도 않는 사랑의 씨앗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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