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 6월 21일(연중 제12주일) 마르 4,35-41; 2고린 5,14-17

예수님은 어느 날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과 함께 호수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타고 떠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앞서가고 다른 배들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당황하여 예수님을 깨우면서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라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서 바람을 꾸짖고 호수를 잠잠하게 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오늘 복음의 내용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알리기 위해 기록된 문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을 믿게 된 사람들이 그들 안에 일어난 삶의 변화가 어떤 것인지를 알리는 문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업이 하느님의 것이라고 믿게 된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우고 그분을 따라서 그들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회상하여 전하면서, 하느님과 신앙인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말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를 읽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 이야기들 안에 나타나는 예수님과 하느님에 대한 초기 신앙인들의 믿음입니다.

▲ 폭풍우 중에 잠을 자는 예수, 제임스 티소.(1836-1902)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과 제자의 관계

오늘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람을 꾸짖고 호수를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분을 모시고 배를 타고 떠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다른 이들도 다른 배로 그들을 뒤따릅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모시고 또 예수님을 따라 떠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명령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배의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과 같이, 마치 계시지 않는 듯이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만, 거센 돌풍과 성난 파도는 그들을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그 사실은 우리를 세파와 세상의 고통에서 안전하게 보호해 주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도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삶의 위기를 겪습니다. 바람에도 시달리고 절망의 늪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은 당황하여 예수님에게 구조를 요청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있자 바람이 멎고 호수는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왜 겁냅니까? 아직도 믿음을 갖지 못합니까?’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세파에 시달려도, 절망의 심연이 위협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어려움 앞에 하느님을 불러 그것을 해결하고, 걱정 없이 사는 것이 신앙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이다.”(마태 7,21) 하느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렀습니다. 성숙한 아들은 아버지를 방패로 삼아 세상을 안전하게 또 편안하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질서에 더 안심합니다. 인과응보라는 질서가 있습니다. 각자가 한 일에 대해 보상이나 벌을 받아야 하는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그 질서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질서를 가르쳤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느님입니다. 그 시대 유대교는 병자를 비롯하여 불행한 사람은 모두 그들의 죄가 원인이 되어 벌을 받고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인과응보의 질서를 하느님에게 적용하여 하느님을 상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이들을 고쳐 주고 용서를 선포하면서 하느님은 인과응보의 질서가 아니라, 자비의 질서 안에 계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재물의 소유를 중요시하는 질서 안에 삽니다. 우리는 재물의 유무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가진 것에 구애받지 않는 행복을 가르쳤습니다. 재물이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길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또한 우리는 입신출세해야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질서 안에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대들 사이에서는....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하느님은 군림하거나 다스리지 않고 섬기십니다. 재물과 높은 지위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생활 질서는 아닙니다. 군림하고 다스리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질서를 넘어 섬김이라는 하느님의 질서를 살아야 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인간의 질서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가

신앙인들 중에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흉내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기적적인 일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기도를 잘 하면, 재물을 주신다고도 믿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힘을 빌리면, 모든 일에 성공한다고도 믿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 안으로 하느님을 끌어들여 상상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강자의 힘을 빌리면,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재물을 많이 가질 수도 있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자들 주변에는 부패와 비리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 되어 하느님의 질서 안에 사는 방식은 아닙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안전하게 또 행세하면서 살기 위해 우리가 필요로 하는 해결사가 아닙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도 고통과 위기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고통과 위기를 극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모시고 또 그분의 뒤를 따라 배를 타고 떠난 사람입니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들이쳐도, 그들은 예수님을 배우고 그분의 뒤를 따르며 삽니다. 그들은 절망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기도하며 용기와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이 세상의 질서에서 발생한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이 신앙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자기의 삶에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어 하느님의 질서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서공석 신부 (요한 세례자)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1964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으며, 파리 가톨릭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광주 대건신학대학과 서강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부산 메리놀병원과 부산 사직성당에서 봉직했다. 주요 저서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신앙언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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