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 신부] 7월 5일(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마태 10, 17-22

신부가 되어 3년 정도 지났을 때 중국을 방문하면서 김대건 신부님이 사제로 서품을 받으신 상하이의 금가항성당을 순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행들과 함께 들어선 성당은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비좁고 촌티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당에 들어선 순간부터 함께 갔던 사제들은 비장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던 신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저도 펑펑 울며 미사를 봉헌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눈물과 울음은 머나먼 이역의 나라에서 차가운 성당 바닥에 엎드려 당신의 온 생명을 봉헌하셨던 신부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감동은 하느님께, 순교자들께, 김대건 신부님께, 나아가 신자들께 죄송한 마음에서 솟구치는 설움 같았습니다.

사제로서의 열정이 타성으로 젖어가는 시점에서 편안한 사제생활을 하면서도 툴툴대며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던 자신의 삶에 대한 창피함의 눈물이었습니다. 목숨까지 바쳐 이어 준 신앙을 삶으로 살아내지 못한 사제의 삶에 대한 민망함의 울음이었고, 더 이상 나태한 신앙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다짐의 울먹거림이기도 했습니다.

▲ 2014년 8월 15일 솔뫼 성지를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과 그 일행이 성 김대건 신부 생가에서 기도하는 모습. ⓒ교황방한위원회

김대건 신부는 1821년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작년 교황께서 친히 방문 하셨던 솔뫼가 생가가 있는 곳입니다. 16살이 되던 해 겨울에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사제가 되기 위해 육로로 평양과 의주 변문을 거쳐 중국 대륙을 종단하듯 내려가 7개월 만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신학교에 입학합니다. 함께 공부하던 최방제를 병으로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고, 마카오의 내전으로 필리핀으로 피난하며 공부를 했습니다. 25살이던 1845년 8월 17일에 한국인 최초의 사제로 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신부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조선교회에 더 많은 선교사의 입국을 위해 길을 준비하던 중 1846년 순위도에서 체포되어 그해 9월16일 25살의 나이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 형으로 순교하여 파란만장한 짧은 생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부르심의 길을 떠난 어린 시절부터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사제로 서품 되었지만, 고국에서 사목을 맘껏 펼쳐 보이지도 못하고 고작 1년 만에 순교를 했다는 사실과 서양학문을 익힌 최초의 조선인으로 외국어(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중국어)와 지리에 능통하여 조정에서조차 그 재주와 인품이 아까워 죽이지 않으려고 회유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자신의 믿음과 삶을 통해 인간적인 아까움 보다 더 크고 소중한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그것은 생명으로 지키는 믿음과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증거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사제이기에 교회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숨으로 지킨 하느님에 대한 증거입니다. 순교로 이루어진 증거의 믿음이 한국인 첫 번 사제가 우리에게 남긴 커다란 유산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도전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자질과 능력이 출중함에도 교만하지 않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굳건하였기에 조정의 회유와 온갖 유혹에도 굽히지 않고 생명을 바쳐 임자(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을 ‘임자’라고 부르셨습니다)에 대한 믿음을 증거한 신부님의 삶은 사제로서 현재를 살고 있는 내 자신에게 커다란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목숨을 바치며 믿음을 지켜야 하는 박해의 시대가 아니기에 안일하고 타성에 젖은 신앙을 살아가는 사제는 그저 편하고 쉽고 안락한 것들만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의를 외치며 맞닥뜨리게 되는 고난을 피하려고 불의를 외면하는가 하면, 진리를 세우기 위한 싸움이 무서워 거짓, 위선을 보고도 예언자의 목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신자 공동체는 좌우, 여야, 진보와 보수의 가치가 섞여 있다고 작위적인 변명을 하며 ‘예’ 할 것을 ‘예’ 라고 말하지 못하고, ‘아니오’ 할 것을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는 반벙어리로 살아가기도 합니다. 부정한 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자행되는 억압과 정의롭지 못한 숱한 폭력 현장의 고통스러운 목소리와 신음을 보고 들으면서도 자신의 안락함이 깨지는 것을 두려워해 신자들과 함께 연대를 위한 투신의 발걸음을 선뜻 내딛지 못합니다.

세상에 가득 찬 이기와 탐욕이라는 맘몬의 논리에 대항해 목숨으로 지킨 신앙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이미 일러 주셨습니다.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하느님을 증언하면서 박해를 각오하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을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증거 할 수 없습니다. 목숨을 건 증거가 없다면 우리 후대의 신앙은 죽음을 이겨내지 못하는 신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죽음을 모퉁이돌 삼아 이어진 신앙을 돌이켜 보는 오늘, 생명을 걸고 믿음을 살아 내고 있는지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깊이 반성해 보게 됩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박해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이니, 세속과 마귀를 거슬러 싸워 공덕을 크게 쌓을 때입니다. 부디 환난에 짓눌려 항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구원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시오. 오히려 지난날의 성인 성녀들의 발자취를 따라 성교회에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이며 자녀임을 증거하시오. 비록 여러분의 몸은 여럿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 되어 서로 도와주고 사랑하는 생활을 하면서 주님께서 여러분을 불쌍히 여기실 때를 기다리시오.”(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편지 중 일부)

 

 
 

 박명기 신부(다미아노)
 의정부교구 청소년 사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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