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기 신부] 5월 17일(주님 승천 대축일) 마르 16,15-20

부활 뒤 40여 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하느님 오른편으로 오르시기 전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삶에 무게를 지우는 슬픈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은 절망적인 죄와 죽음을 깨부수고 생명과 부활이라는 희망을 주신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기쁜 소식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비참한 죽음의 실패처럼 보이지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 일으켜 세우시는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죽음의 상황에서 생명을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부활은 인간의 능력과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창조질서의 밑바닥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슴 벅찬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은 오늘 승천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마지막 사명입니다.

사제 서품 뒤 앳되고 치기 어린 맘으로 짐짓 내가 제일 열심히 잘 사는 줄 알았고, 게다가 신학교 생활만 했으니 교우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공감도 없이 교리와 신앙생활을 엄하게 요구하곤 했습니다. 전쟁터와 같은 세상에서 고군분투 하며 그리스도의 빈자리를 채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교우들에게 강론 때나 공지 사항 때 혹은 회합에 들어가 말도 안 되는 듣기 싫은 소리를 비수처럼 쏘아대던 시기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로소 교우 한사람 한 사람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힘들고 어려운 여건과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찾기 위해 애쓰는 그들의 믿음이 사제인 나보다 오히려 더 강건함을 체험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고된 생업에 치열하게 매달리다 유일한 휴일인 주일마저 성당에 와서 미사참례하고 봉사까지 거절 않는 교우들에게 고마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 위로받고 매달리며 따뜻하게 안아 주시길 바라는 마음은 사제와 신자들 모두가 똑같을 텐데, 내가 교우들에게 그동안 선포한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엉뚱하고 독선적인 아집에서 나오는 무겁고 힘겨운 소리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말로써 혹은 삶으로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 이웃과 세상에 참으로 기쁜 소식인지 돌이켜 보게 됩니다.

수많은 언론과 대중 매체를 통하여 지난 수년간 벌집을 쑤셔 놓듯 나라를 구석구석까지 헤집어 놓은 소식들을 생각해 봅니다. 온갖 규제완화로 발생한 참혹한 죽음들, 4대강 사업처럼 국책사업이란 미명으로 자행된 국토훼손과 환경파괴, 핵발전소 사업으로 삶의 터전에서 내쫓긴 농촌의 어르신들, 재개발과 도시계획이란 논리로 철거되어 버린 주거 정의,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하는 기업에 희생당한 생명들과 삶의 의지를 빼앗긴 해고 노동자들, 국민의 생명 보호를 포기한 부패 정권에 의해 자행된 세월호참사 등등.... 이 나라는 기쁜 소식을 들어 볼 수 없는 듯 암울한 세상입니다.

정의와 진리가 사라진 것 같은 세상, 기쁨과 희망이 단절된 시대, 생명과 존엄을 짓밟는 권력의 소식만 어지럽게 흩날립니다. 사람과 나라를 살리는 소식은 찾아볼 수 없고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 차 생명의 밑바닥에 떨어진 것 같은 처참함 마저 느껴야 하는 소식들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하며 불의와 부정에 맞서 싸워 왔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 없이 민중의 무능력과 비참함을 절감해야만 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죽음에서 부활을 일으키신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고통으로 눈물 흘리는 이웃과 함께하는 선한 이들의 연대에서 스러지지 않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연약하지만 끊이지 않는 기억, 진실과 정의를 위한 외침과 기도, 조금이라도 변화되기 위한 행동은 이 암울한 시대에 던져지는 기쁜 소식입니다. 승천하시며 제자들과 믿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명이 바로 복음 선포입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com

우리 모두의 말과 삶으로 선포되는 것은 이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에게 생명과 희망이 되는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소식, 절망의 소식이 아니라 희망의 소식을, 어둠이 아니라 빛의 소식을, 불의의 소식이 아니라 의로움의 소식을, 이기와 탐욕의 소식이 아니라 이타와 나눔의 소식을, 소외와 냉대의 소식이 아니라 존엄과 연대의 소식을, 불통의 소식이 아니라 소통과 관계의 소식을 선포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역할입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죄와 죽음을 이긴 복음 선포의 사명을 하늘만 쳐다보며 멍하니 있는 우리에게 넘겨주셨습니다. 불의와 죽음의 문화가 지배하는 시대에 하느님의 의로우심과 다스리심을 외치셨던 예수님의 복음은 믿는 이들에 의해 온 세상 모든 피조물에게 선포돼야 합니다. 승천하시는 예수님은 기쁜 소식을 선포해야 하는 당신의 모든 역할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우리는 어떤 소식을 선포하고 있습니까?
 

 
 

 박명기 신부(다미아노)
 의정부교구 청소년 사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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