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미래’가 점쳐지지 않는 시대다. 연애 포기, 결혼 포기, 출산 포기라는 이른바 3포 세대는 이제 신조어나 일종의 비유법 수준이 아니다. 그냥 우리 젊은이들의 현실이 됐다. 거의 확실한 생존법칙처럼 굳어가고 있다. 부모가 여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제 한 몸도 건사 못하는데 무슨 연애? 무슨 결혼? 사람을 못 만나는데 애는 어떻게 낳고?

이런 판국에 한동안 유행한 건 ‘썸’이라는 단어였다. 믿을 건 오직 순간의 감정뿐이라는 뜻인가. 그렇다면 ‘썸’이란 과연 무엇인가. 설령 안다 해도 잡을 수는 있는 것인가. 바람 같고 안개 같은 어떤 알쏭달쏭한, 분명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뭐가 있는 사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그런 상태를 말이다.

사진 출처 = JTBC 홈페이지
예전엔 ‘남의 연애’에 대해 썸씽(something)이라는 단어를 많이 썼다. 썸씽이라고 하면 그리 긍정적인 느낌은 아니긴 하다. 부러워서일까. 어쨌든 은밀하면서도 구체적인 연애의 사건을 내포한 뉘앙스다. 그런데 요즘의 ‘썸’ 혹은 ‘썸 탄다’는 말은 다르다. 어떤 규정할 수 없는 알쏭달쏭하고 들쭉날쭉한 감정의 미묘한 외줄타기 느낌이다. 정기고와 소유가 함께 부른 가요 ‘썸’이 지난해 오랫동안 가요 순위 정상을 차지하면서, ‘썸’에 대한 총정리를 해 주기도 했다. 썸을 고대하지만 막상 눈앞에 다가온 그것이 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심정을 제대로 포착해낸 가사 덕택이다. “요즘 따라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 니 꺼인 듯 니 꺼 아닌 니 꺼 같은 나”, 이게 바로 ‘썸’이란다. ‘연인인 듯 연인 아닌 연인 같은 너’ 때문에 애타는 상황이란다.

JTBC의 ‘마녀사냥’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들었다. 연애상담을 표방한 프로그램은 예나 지금이나 많다. 라디오 연애 상담을 넘어 요즘엔 TV며 온갖 블로그들까지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많은 사연을 정리하고 대신 살아 주기라도 할 듯이 군다. 그럼에도 방송 초기 이 프로그램의 포맷은 독보적이었다. 기성 프로그램들이 놓친 ‘썸’을 본격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처음 ‘마녀사냥’의 목적은 한 마디로 “당신의 썸을 알아 맞춰 드립니다”에 있었다. 제작진이 너무 진지하게 대놓고 토의를 거듭하니, 심지어 설득력마저 있었다. 첫 번째 장점은, 솔직함이었다. 시청률을 위해 오버하지도 않았고, 최대한 시청자와의 공감대를 맞추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지난해 처음 방영을 시작했을 땐, 그 획기적인 시도가 수많은 열혈 팬들을 낳았다. 공중파라면 여러 가지 제약들이 있었을 내용이지만, 종편에서 요즘 시청자들이 가장 원하고 답답해하는 것들을 잘 포착한 사례였다.

▲ '마녀사냥' 4명의 진행자. 위부터 신동엽, 성시경, 허지웅, 유세윤 (사진 출처 = JTBC 홈페이지)
남녀가 사귀기 전 단계,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확신은 없는 단계. 이런 수많은 ‘썸’의 사연들이 매회 연애 긍정 신호인 ‘그린 라이트’인지 아닌지를 판단해 달라고 보챘다. 본인에게는 정말 심각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청자가 봐도 구체적으로 짚이는 건 별로 없다. 말 그대로 애매모호한 ‘감’과 ‘촉’으로 알아 맞춰야 한다. ‘마녀사냥’의 MC 네 남자의 기능은 이 야릇함을 판정해 주는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의 역할이었다. 또한 애정 생활에 대한 지침을 주는 남자 선배 역할도 맡았다. 자신이 겪었던 혹은 상상한 한도 내에서의 최대치의 구체성을 끌어내야 한다. 대단히 주관적인데다 심지어 이 네 남자 중 상당수는 ‘제 머리도 못 깎을’ 것 같은 좀 모자란 상태로 보였다. 그럼에도, 이들의 조언은 한없이 진지했다. 뭔가 손에 잡히지도 않는데 감정의 줄타기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시청자 ‘대신’ 결정해 주는 멘토의 말씀이었으니까. 2부로 넘어가 공개토론 식의 구성이 되면, 더 많은 패널들이 나와 남의 ‘썸’에 대해 최대한의 조언을 했다.

예전 같으면, 다쳐도 좋으니 직접 부딪쳐 보라는 조언밖엔 할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심각한 리스크 관리의 시대다. 짝짓기는 이제 경제학의 관점, 고도의 스펙의 영역이 되고 말았다. 투입한 에너지를 회수할 수 없다면 절대로 뛰어들기 두려운 인생 최고의 도박이 됐다. 한 방에 모든 것을 날릴 각오도, ‘경험’으로 웃어넘길 여유도 지금 젊은이들에겐 없다. 다들 부족하고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 안에서 최대치의 썸을 끌어내야 한다.

그래서 그 조언들이 사연의 주인공에게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그 진지함과 열렬한 응원만큼은 시청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되곤 했다. 이 프로그램의 두 번째 장점이었다.

그런데 이 또한 다 옛 얘기가 되고 말았다. 방영 1년을 넘기며 ‘마녀사냥’은 포맷을 많이 바꾸었다. 방영 초기와 달리 지금은 비슷한 방식의 유사 프로그램들이나 꼭지들도 많이 생겨났다. ‘마녀사냥’은 이제 한마디로, 사연 주인공의 ‘카톡’에 대한 조언이나 과거 연애담을 까발리는 식의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다. 시청자를 잡기 위한 눈요기 강화로 보이는 여러 전략들을 쓰고 있지만, 이 프로그램만의 장점은 사라졌다. 일단 보편성의 상실이다. 특정 사연 주인공에게 특화된 어떤 조언으로 가면서, 실상 대부분의 시청자에게는 다소 무책임해지고 말았다. 그런 내용을 굳이 전파로 내보내야 할까 싶을 때도 있다.

어쩌면 이제야말로 ‘마녀사냥’이 제대로 된 조언을 시청자에게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연애는, 직접 부딪치고 깨져가며 터득하고 배워가는 것이다. 텔레비전이 절대로 가르쳐 줄 수 없는 영역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모호한 욕망을 매체가 마치 다 ‘알아서’ 채워줄 것처럼 구는 각종 프로그램들이 절대로 해 줄 수 없는 본질적 요소다. 먹는 것도 사람 사귀는 것도 TV가 다 대신 해줄 것처럼 구는 시대에, 시청자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부터 다시 고민해야 할 때다. 

▲ 손님으로 나온 서장훈이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 (사진 출처 = JTBC 홈페이지)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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