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여우사냥꾼이 놓은 덫에 걸린 한 젊은 수여우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다. 겨우겨우 살아나긴 했지만 꼬리가 없다. 꼬리가 없어도 ‘여우’일 수 있는가? 수치스럽다. 그렇다고 잘린 꼬리를 ‘복원’할 수는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는 월악산 여우들을 모아 놓고 꼬리의 불편함을 역설하며, 꼬리를 자르고 ‘인간’으로 진화하자고 부추긴다. 몇몇 여우들이 동조하며 꼬리를 자른다. 수여우는 반대하는 여동생의 꼬리도 잘라 버린다. 이렇게 꼬리 잘린 여우 네 마리가 고속도로를 지나는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로 온다.
여우들이 탄 트럭은 서울광장, 그러니까 시청 앞에 도착한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각각 정보요원, 사회변혁운동 대표의 비서, 오토바이 소매치기, 비정규직 청소부가 되어 ‘밥벌이’를 하게 된다. 매달 보름달이 뜰 때 남산타워에서 만나고 또 헤어진다. 그렇게 인간들 속에 섞여 살아간다. 인간처럼. 여우처럼. 여우도 인간도 아닌 정체불명의 괴물처럼.
인간들은 큰 사고와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이게 다 여우에게 홀린 탓이라고 여긴다. 보수와 진보, 양쪽 모두 여우 탓만 한다. 꼬리 자른 여우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구미호는 인간들이 이런 식의 ‘여우 박해’를 행하면서, 스스로 덫에 걸렸음을 경고한다. 이 덫은 말하자면 인간들 자신이 만들어 냈으나, 이제 누가 여우이고 누가 인간인지 식별할 수 없게 됐다. 아무리 뛰어도 과거의 반복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이 ‘뫼비우스의 띠’의 궁극이다. “아무리 뒤집어도 과거와 현재뿐. 미래는, 없습니다.”
마지막 날 오후에 공연을 보았다. 무대나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가 극단적인 깔끔함과 어수선함이 혼재돼 있었다. 혼돈 그 자체인 이 세상을 빗댄 것일까. 관객에게 고도의 집중을 요구하는, 100분 동안 쉼 없이 움직이는 무대와 함께 호흡해야 하는 작품이라 보고나니 맥이 탁 풀릴 지경이었다. 이쪽도 저쪽도, 인간도 여우도,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의 정체를 모른다. 기존의 ‘이분법’으로는, 이전의 사고방식의 틀로는 이 복잡하고 교묘한 세상을 도저히 알아챌 수 없다. 어쩌면 굉장한 진실을 보고만 기분도 들었다.
‘기성세대’는 오늘의 이 사태를 ‘해석’할 능력이 없는 게 아닐까? 이전의 세상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 ‘풍자’도 ‘사회비판’도 맥락을 제대로 잡아 내기 어려워진 세상에 대한 곤혹스러움. 그 처절한 자괴감마저 보였다. 댓글이 정치를 하는 요망한 세상, 일개 댓글이 한 편의 연극보다 더 풍자를 잘하는 듯 보이는 이 ‘전도’된 것처럼 보이는 세상. 끝내 ‘진짜’이고 싶은 자들은 무엇을 붙잡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공연 중 두 번 ‘애도의 노래’와 ‘세월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흰 옷을 입은 배우들이 무대를 돌며 부르는 가사가 처연하다.
“미안 미안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못 해 줘./ 미안 미안합니다. 우리가 구해 주지 못해서...”
공연이 끝난 뒤 광화문광장으로 내려오는데, 한 전시물이 있었다. 416 기억저장소에서 진행하는 ‘아이들의 방’ 전시였다. 빈 방. 세월호와 함께 돌아오지 못하게 된 아이가 쓰던 방. 그 방의 주인이 금세라도 의자에서 일어나 반길 것만 같은 너무도 생생하고 예쁜 방. 너무 예뻐서 보는 이를 눈물 나게 하고,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는 방. 진짜 사람이 살았던 진짜 방을 보았다. 이분법도 양비론도, 그 모든 것을 무색하게 하는 방이었다. 우리가 정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 방은 말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생생한 웃음소리와 재잘거림이 귓전을 때리는 것 같은 방의 공기. 그렇게 곱게 키운 아이들을 그토록 허망하게 떠나보내고도 우리는 어쩌다보니 제대로 울지도 못하는 허깨비들이 되었다. 지금은 생각할 때가 아니라, 울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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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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