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 광해군(차승원 분)(사진 출처 = MBC 홈페이지)
광해군이 얼핏 주인공처럼 보이는 사극이 방영을 시작했다. <MBC> 월화극 ‘화정’이다. 제목은 조화롭고 화평한 정치라지만, 시절은 참담하다. 극악무도하고 잔인하다. 선조의 죽음으로 시작해 광해군의 즉위 초부터 인조 말까지를 다룬다고 한다. 계축옥사, 인조반정, 병자호란, 정묘호란을 배경으로 그 시절의 굵직굵직한 인물들이 등장할 예정이다. 정말 여기까지만 보면 광해군(차승원 분)의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 작품 개요를 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귀한 신분인 공주로 태어났으나 권력 투쟁 속에서 죽은 사람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는 정명공주의 삶을 다룬 드라마.” 그러니까 주인공은 정명공주다. 영창대군의 누나이자 선조의 ‘적녀’로 태어난 정명공주가 그 피의 정변 속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장수하며 자손을 번창시킨 ‘비결’이 관건인 듯하다. 제목 '화정'은 정명공주가 남긴 글씨라고 한다. 동명의 원작소설이 시중에 나와 있다. 시대로만 보면 <KBS> ‘징비록’에서 바로 이어지는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차승원이 맡은 광해군은 슬픔과 우수에 찬 눈빛으로 고뇌에 찬 세자가, 세자 책봉 십 수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르는 고난의 과정을 심도 있게 보여 주었다. “하늘의 뜻보다 강한 것은 사람의 의지라는 것을” 믿는 한음 이덕형(이성민 분) 대감과 앞으로 이뤄 나갈 대동법과 민생구제의 열망도 설득력 있게 그려졌다.

▲ 정명공주(이연희 분)(사진 출처 = MBC 홈페이지)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정명공주(이연희 분)다. 그것도 인목대비가 사저에 잘 ‘숨겨’ 놓은 덕택에, 남들이 안부를 물으면 늘 ‘죽었다’고 둘러대는 통에 살아남았다가 인조반정 이후 자손을 낳고 장수했다는 역사 기술이 거의 전부인 정명공주가, 그 은둔의 ‘리더십’으로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기획의도인 듯하다. 일단 왕자가 아닌 공주였기에 왕위와 무관했고 그래서 살아남았던, 조선시대에 거의 사회적 생활을 봉쇄당했던 여성의 처지였기에 목숨은 부지했던 사람에게서, ‘화합과 상생’의 리더십을 어찌 찾아낼지 좀 기가 막히다. 존재감이 아예 없기에 부지한 목숨도 산 것인가.

조선시대에는 ‘살아도 죽은’ 대접을 받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했다. 형벌에도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 솥찜질이라는 형벌을 보자. 부형(釜刑) 또는 팽형(烹刑)이라고도 불린 일종의 관습법이었다. 나라의 재산에 손실을 입힌 자와 탐관오리들을 처형하는 수단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이가 볼 수 있도록 청계천 다리 위에서 행해졌다. 이 솥찜질은 청계천에 있던 다리 ‘혜정교’에서 행해졌다. 일제 치하인 1926년 복청교(福淸橋)로 이름을 바꾼 이 다리의 본래 이름은 혜정교(惠政橋)였다. 좋은 정치라는 뜻이다.

이 솥찜질이 있는 날, 다리 위에는 임시로 높다란 부뚜막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들어갈 만한 가마솥을 걸었다. 아궁이에는 불을 지필 장작이 마련돼 있고 그 앞에 병풍과 군막(軍幕)을 둘렀다.

상석에 포도대장이 앉으면 집행관이 입장하면서 솥찜질이 시작됐다고 한다. 먼저 집행관이 다리 밑 청계천 물을 떠다 솥에 붓고 죄인인 탐관오리를 끌고나와 부뚜막 앞에 꿇어앉힌다. 포도대장이 죄목을 크게 낭독하고 형을 선고하면 죄인을 들어 솥 속에 구겨 넣고 뚜껑을 닫는다. 그러고서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연기를 내는 것으로 형을 끝낸다. 솥 속에 삶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죽었다’는 일종의 형식만 남은 형벌이었다.

솥찜질을 받은 죄인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죽은 사람이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의 모든 것은 솥에 들어가면서 끝났다. ‘살아 있는 시체’로 살다 죽어야 했다. 죄인이 가족에게 인도될 때부터 죽은 사람 시늉을 해야 했다. 상여에 떠메인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집에 돌아와 초상을 치르고 나면 이 죄인은 금치산자(禁治産者)로 법적으로 완벽하게 소외당한다. 사회적 소외라는 무서운 제재로 부정부패를 줄이는 예방책을 쓴 것이다. 솥찜질은 그러니까 창피를 주는 벌이었다.

솥찜질의 처형 장소 이름이 좋은 정치를 베풀었다는 혜정(惠政)이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정치의 근본은 좋은 본보기를 백성 모두에게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백성의 답답함을 후련하게 풀어 주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자들을 공개적으로 처벌하고 사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는 것이 바른 정치의 본질 아닐까. ‘화정’이란 그런 것이다. 썩은 땅에서 죽은 척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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