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상식 속풀이-박종인]

세례를 받고 한 해 정도 신앙생활을 한 친구가 요즘들어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례 때 선물로 받았던 5단 묵주와 손가락에 낀 반지 묵주가 그냥 장식으로 남아 있는 게 싫었던 모양입니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묵주기도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집중적으로 청하고 싶은 사안도 생긴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지향이란 것이 교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는데 청원의 내용이 의외로 기특했습니다. 자기가 호감을 가지는 누군가와 자신의 관계가 좀 더 진지하고 “찐한” 것으로 발전되기를 바라기보다, 그 상대가 계획한 일이 잘 풀리게 해 달라며 9일 기도를 바쳤다고 하니, 그 친구의 마음이 넉넉하고 성숙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에게 일상적으로는 어느 요일에 묵주기도의 어떤 신비를 바치는지 알고 있는지를 물었더니 정작 그 기준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 묵주반지.ⓒ지금여기 자료사진
사실, 꼭 그래야 하는 규정은 없습니다만, 요일에 따라 전통적으로 바쳐 온 신비가 있기는 있습니다. 9일 기도에서는 환희, 고통, 영광을 차례대로 아홉 번씩 바쳐서 스무이레 동안 청원기도로서 바치고, 마찬가지의 순서로 스무이레를 감사기도로 바쳐 총 쉰나흘 동안 각 신비를 순서대로 반복하기에, 어쩌면 요일 구분을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청할 것이 있어서 매우 계획적으로 바치는 9일 기도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생애가 보여 주는 신비를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시고 싶은 분들에게는 이번 속풀이가 괜찮은 지침이 될 듯합니다.

전통적으로 각 요일에 정해진 신비는, 월요일에 환희, 화요일에 고통, 수요일에 영광, 목요일에 다시 환희, 금요일에 고통, 토요일에 영광의 신비였고, 주일에는 기도를 쉬었습니다.... 가 아니라 영광의 신비를 한 번 더 바쳤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환희, 고통, 영광을 차례대로 한 번씩 해서 각 신비 당 두 번씩 바치고, 주일에 영광의 신비를 한 번 더 묵상하는 틀거리입니다.

의미상,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요일인 금요일에는 고통의 신비가 어울리고, 주님이 부활하신 주일에는 부활을 묵상할 수 있는 영광의 신비가 어울린다고 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통의 신비는 화요일에도 묵상하는데, 이런 이유 때문인지 금요일에 금육을 하듯이 화요일에도 금육을 하는 전통이 유럽에는 남아 있더군요. 사제품을 받은 후 마무리 공부를 하는 동안 제가 머물렀던 프랑스 파리의 공동체에서는 금요일만이 아니라 화요일에도 고기가 섞인 메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화요일 아침마다 공동체 앞에 서는 거리 시장에 가서 물고기를 사 오는 일이 매우 재미 있었습니다.

아무튼, 말씀드린 순서대로 바쳐 오던 전통적인 신비가, 2002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예수님의 공생활이 담긴 ‘빛의 신비’를 추가함으로써, 바치는 요일에서 살짝 변화가 생겼습니다.

월, 화, 수는 변함없이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를 차례대로, 목요일에 빛의 신비가 끼어들었고, 금요일에 변함없이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고통의 신비, 토요일에 환희, 주일에도 변함없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영광의 신비를 바치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환희, 고통, 영광의 신비를 각 두 번씩, 목요일에 빛의 신비를 묵상하게 되는 구도가 된 것입니다.

전에 이미 다뤘던 속풀이(“어떤 기도가 가장 좋은 기도죠?”)에서도 언급했듯이, 환희, 빛, 고통, 영광의 신비를 차례로 바치면 예수님의 생애를 탄생에서 승천까지 묵상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가 기록된 복음서를 묵상하는 효과가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묵주기도의 기도 주제를 어찌하여 신비라고 부르는 걸까요? 신비(神秘, mystery)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깨달을 수 없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이며, 신이 계시한 진리”(전례사전, “신비”항 참조)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나 강생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무엇이고, 비록 지금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해도 깨닫기 위해 끝까지 캐어 물어야 하는 무엇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하느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강생의 신비에 관한 것이기에 신비입니다. 이 신비는 분명히 우리 앞에 드러난 것이면서도 그 깊이를 온전히 헤아릴 수 없기에 신비인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앎이 어느 순간 멈춰 버릴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서 온전히 이 신비를 이해하게 될 때까지 신비는 끊임없이 하느님에 대해 알려준다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갈라진 형제들이 오해하듯, 묵주기도를 바치는 행위를 성모숭배로 보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가 묵주기도의 각 신비가 담고 있는 내용을 제대로 살피지 않기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더불어 이 기도는 성모님께 무엇을 청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묵주기도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인 이득은, 성모님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께 청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며, 또한 성모님과 함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애, 즉 그 신비를 헤아릴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입니다.

 

 
 

박종인 신부 (요한)
서강대 인성교육원(경기도 가평 소재) 운영 실무
서강대 '영성수련'  과목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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