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가 관할하는 서해의 섬들은 많다. 쾌속선이 생기고선 예전처럼 낙도란 말이 무색하지만 그곳에 부임하는 사제들에겐 여전히 낙도다. 뭍에 나오는 일이 큰일이고, 돌아가는 길이면 몇 안 되는 본당 꼬마들을 위해 피자나 햄버거 같은 도시의 냄새를 한 가방 챙겨 가야 한다. 드물게 본당이 신설되긴 해도 과거의 복작거리던 공동체는 기대하기 힘들다. 모두 도시로 뭍으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제법 규모가 있는 섬 가운데 덕적도는 아직도 거리로나 마음으로나 멀고 먼 진짜 섬이다. 지금은 폐허뿐이지만 이 낙도에도 한때 큰 병원이 있었다. 덕적도란
팔불출 같은 이야기지만 본당의 첫날은 편치 않았다. 굳이 데리러 오겠다던 본당 신자들. 전 임지 동료들의 전송을 받으며 올라탄 승용차. 침묵이 이어지다 동승한 신자가 말문을 열었다. 이야기는 이랬다. 새 신부가 좋은 사람이라는 소문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많이들 걱정한다는 것이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이야기 중 ‘정치 신부’란 단어가 제일 거슬렸단다. 뭐라 답할까. 머쓱한 웃음으로 걱정 마시라 했다. 내 차를 몰고 갈 걸 하고 잠시 후회했다. 걱정하는 그들을 나 역시 걱정했다.본당은 우려와 달리 따듯했다. 20년 전에나 유행하던 성미함을
일 년 만에 찾은 제주 강정. 본당 사목실습을 온 부제가 아니라면 또 언제 찾았을지 모를 일이다. 현장에 함께 가 보고 싶다는 말에 선택한 곳이지만 대뜸 의아한 표정이다. 해군기지가 들어선 곳, 이미 결판난 싸움터니 ‘현장’이 아닐 수도 있겠다. 갸우뚱한 그에게 왜 그곳이 여전히 현장인지 바로 설명할 수 없었다. 십 년 남짓의 강정 싸움에 아예 그곳 주민이
웬만한 규모의 상가 건물이면 어디든 빠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식당, 학원, 헬스장, 그리고 요양병원. 먹고, 공부하고, 근육을 키우는 공간에서 동시에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묘한 구조는 누가 설계한 것일까.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은 이들과,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이들의 같을 수 없는 속도의 시간이 무심히 함께 흐른다. 볕 좋은 날
성금요일, 마음은 온통 토요일 무반주로 혼자 불러야 하는 부활찬송에 쏠려 있었다. 십수 년 만에 불러보는 노래니 신경이 곤두설밖에. 오르간을 곧잘 타고 노래도 잘 부르는 본당 신학생이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신학교에서 막 본당에 돌아온 신학생과 함께 건반 뚜껑을 열 찰나 전화가 울렸다. 정리해고, 직장 폐쇄, 노조 설립 등의 이유로 일터에서 쫓겨난
종종 글이 어렵단 소리를 듣는다. 내용은 고만고만한데 쓰는 단어나 문장이 낯설어서란다. 굳이 이걸 써야 했나 싶은 말들이 듬성듬성 있어 잘 넘어가지 않는단다. 그게 문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실 자연스런 표현들은 내 말 같지 않아서다. 말의 무게도 모르면서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될 것 같았다. 희망, 헌신같은 추상적 가치를 담은 말이면 더욱 그렇다. 관용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