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훈 신부의 바깥 일기]

오늘부터 매달 넷째 수요일에 '장동훈 신부의 바깥 일기'가 연재됩니다. 사람을 위하여, 사람 때문에 아예 사람으로 온 예수의 눈을 빌어 교회와 세상을 바라봅니다.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세상 것은 사랑할 수 없는 믿는 이들의 오늘을 함께 고민합니다. 칼럼을 맡아 주신 장동훈 신부에게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종종 글이 어렵단 소리를 듣는다. 내용은 고만고만한데 쓰는 단어나 문장이 낯설어서란다. 굳이 이걸 써야 했나 싶은 말들이 듬성듬성 있어 잘 넘어가지 않는단다. 그게 문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실 자연스런 표현들은 내 말 같지 않아서다. 말의 무게도 모르면서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될 것 같았다. 희망, 헌신같은 추상적 가치를 담은 말이면 더욱 그렇다. 관용구 같은 문장 역시 듣기는 익숙해도 내 말은 아니다. 그런 내가 요즘 스스로 놀란다. 처음으로 일선 본당을 책임지고 나서부터일까. 미사 말미에 덧붙이는 ‘희생과 헌신의 한 주간’ 따위의 ‘덕담’ 같은 말을 늘어놓을 때면 뒤에서 혼자 부끄럽다. 그렇게 적당히 무뎌졌지만 내 입에서 아예 떨구어 버린 것 같은 말들도 있다. 세월호도 그중 하나다.

세월호가 물 밖으로 나왔다. 3년, 날수로 1073일 만이다. 탄핵된 대통령이 검찰이 작성한 조서를 밤을 새며 검토하고 맞은 아침이었다. 그녀가 조서를 훑어보는 데 써 버린 시간의 길이는 공교롭게도 참사 당일 잃어버린 세월호의 시간과 같았다. 당사자에겐 할 수만 있다면 다시 메우고 싶은 시간이었을 게다. 아니 누구든 그랬을 거다.

성주간 수요일

종일 오락가락하던 생존자 숫자만을 지켜봐야 했던 참사 당일은 죽음에 이르는 예수의 여정이 절정으로 치닫는, 교회의 시간 중 가장 거룩하며 가장 비통한 성주간 수요일이었다. 더러는 예수가 바닷속 아이들과 함께 죽은 거라 말했다. 부활이 부활일 수 없었다. 부활대축일이 끝나고 사제와 수도자가 관례적으로 갖는 ‘엠마오’ 휴가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그해 엠마오는 전국의 사제 수도자들이 모처럼 의기투합해 고압송전선로 건설로 한참 갈등을 겪고 있던 밀양 주민들에게 위로라도 하자고 한데 모이기로 약속한 터였다. 방문을 위해 미리 준비한 노란 현수막과 깃발에 검은색 리본을 급히 구해 매달았고 가슴팍에도 나누어 달았다. 위로랍시고 찾아가선 결국 주민들과 둘러앉아 숨죽여 울어야 했다.

가슴에 달았던 리본의 색깔이 검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뀌었을 즘 전국을 뒤덮던 추도의 물결은 어느새 살얼음판 같은 긴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늦은 봄 어느 저녁, 희생자 아이의 부모들은 우의 하나 없이 광화문 광장에 자리를 틀었다. 새벽까지 부모들을 지켜보다 광장을 빠져나와 편의점에서 따듯한 우유로 추위와 허기를 달랠 때까지도 나와 동료들은 부모들이 이리 긴 장례를 치를 줄은 몰랐다.

▲ 2015년 서울대교구 세월호참사 1주년 미사에서 사제들은 모두 제의에 노란 리본을 달았다.ⓒ배선영 기자

그해 여름

그해 여름의 광화문은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천막 사이마다 비닐 조각을 잇대 그늘을 만들었지만 한여름 땡볕을 피하기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추모객과 관광객이 뒤섞여 오가던 광장에는 곡기를 끊은 부모들을 취재하려 기자들이 아예 진을 치고 있었고 분수광장의 왈칵거리는 물줄기 사이로 아이들이 뛰놀았다. 여러 종파의 뒤엉킨 기도 소리까지,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숨이 막혔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부모들의 손을 잡아 준 교황이 한반도 상공을 벗어나며 남기고 간 한마디가 한동안 힘이 되었다. 위로인 동시에 갈수록 짙어지는 무기력을 견디는 데 내겐 그보다 든든한 명제는 없어 보였다. 고꾸라질 때면 자맥질하듯 곱씹었다. 방한으로 나아진 것은 없었다. 교황과 함께 외신이 떠나갔고 세상의 시선도 순식간에 광장을 빠져나갔다. 부모들의 몸은 더 오그라들었고 가슴에 단 노란 리본은 어느새 다윗의 별처럼 불심검문의 표식이 되었다. 그해 여름방학 나는 광장을 끝내 벗어나질 못했다.

다른 밀도의 시간

그렇게 시작된 세월호와의 인연은 소임이 바뀌고서도 이어졌다. 팽목과 광화문을 오가며 동료들과 함께 기도회를 열고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광장의 겨울에도 미사를 봉헌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익어 갔다. 일상의 곁가지처럼 세월호란 말이 더는 그해 여름만큼 아프지 않았다. 화랑유원지의 희생자 분향소와 광화문 광장의 비닐 천막도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구조물처럼 주변의 풍경에 스며들었고 거리에서도 노란 리본을 자주 볼 수 없었다. 언제쯤이면 부모들의 장례가 끝날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을 만큼 시간의 날은 무디어 갔다.

그러나 부모들은 쉬지 않았다. 날 선 그대로, 아니 칼날을 아예 가슴에 심고 살았을 부모들이다. 하루가 다르게 요동치는 정국으로 간신히 끌어 모은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져도 한 번도 주저앉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부모들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그렇게 다른 밀도로 흘렀던 것이다. 누구에겐 무디어져 밋밋한 일상이 누구에겐 전쟁이었을 테다.

▲ 6차 광화문 촛불 집회에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세월호 7시간' 팻말을 들고 행진하고 있다. ⓒ김용길

부모들이 지킨 말

대통령 탄핵까지 6달 내내 이어진 광장의 촛불은 부모들의 광장을 빌려 타올랐다. 모두의 광장이지만 분명 부모들이 지킨 광장이다. 인산인해가 무슨 말인지 실감할 정도로 떠밀려 다녔던 그날의 촛불을 보며 진공처럼 떠 있던 광장의 시간을 견딘 부모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들이 지킨 것이 광장만일까.

탄핵 결정문에서 세월호가 탄핵 사유에서 제외되자 부모들은 다시 오열했다. 제외 이유는 구조의 최종 책임자가 대통령은 맞지만 그 직책을 성실히 수행했는가와 같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의 여부로는 판단이 어렵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지난 삼 년, 부모들을 지탱했고 부모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 역시 죄다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것들 아니던가. 결국 자식이니 포기할 수 없고 부모이니 잊을 수 없다는 도무지 실측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아니던가. 인간다움, 일상의 시간으로 빗겨 있던 광장 밖과는 달리 부모들이 꼬박 그곳에서 지켜 냈던 그것은 결국 희망, 연민, 사랑처럼 밑도 끝도 없지만 우리의 오늘에 반드시 필요한 본질적 가치였던 것이다. 사람이니까, 사람이기 위해서 부모들은 주저앉을 수 없었다. 사실 예수가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궁극의 것도 다르지 않다. 그가 지킨 최후의 단어 역시 헤아릴 길 없는 사람이었다.

말의 무게 때문에, 아니 감당이 되지 않아 떨구어 버렸던 나의 말들을 그러고 보니 그 시간 가지고 있던 것은 광장의 부모들이었다. 그들이 내 대신, 우리 대신 간직해 왔던 것이다. 올해 부활대축일은 공교롭게도 바다로 아이들이 떠난 지 삼 년 되는 날이다. 꼬박 삼 년을 채우면 나의 말들도 돌아올까.

 
장동훈 신부

인천교구 중1동 성당 주임
인천교회사연구소 소장
인천가톨릭대학교 교회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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