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심한 각혈 끝에 처음 성모자애병원에 입원했던 것은 신품을 받던 그 해 성탄절 바로 다음 날이었다. 급성 폐결핵이라고 했다. 며칠만 쉬고 나가라던 의사의 말을 믿고 얼떨결에 입원실에 들어갔던 나는 매일 대여섯 대씩 주사를 맞고 약을 한 줌씩 먹으며 자그마치 석 달 열흘이나 병원 별관에서 격리 수용을 당해야 했다.
나 같은 사람만 있으면 병원 다 망할 거라는 자신감으로 건강하게 30년을 살았다. 그러던 내가 마치 30주년 기념식이나 하듯이 작년 봄에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위암이었다. 꼭 열흘을 병상에서 지내고 퇴원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두 차례의 병치레로 뜻밖에 많은 은인들을 얻었다. 3년이 넘도록 폐병을 치료해주신 내과 과장 최제하 선생님, 곱슬머리 주치의 백남종 선생님과 간호사들, 가정동 기도의 집에서 내쫓긴 폐병쟁이 나를 받아주신 오산의 노틀담 수녀님들과 계수리 바오로 농장의 유 델피나 수녀님. 줄줄이 고마운 분들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는 그 때, 그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안 했다. 오히려 젊은 놈이 이게 무슨 꼴이냐고 허구한 날 한숨만 쉬었던 것 같다. 한심한 나였다.
그로부터 30년 후, 위 절제 수술에 일곱 시간 걸렸다는 외과 과장 김진조 선생님, 밤낮없이 병실 드나드는 간호사들, 환의까지 갈아 입혀주신 박귀분 수녀님, 병원장 제정원 신부와 부원장 박문서 신부, 퇴원해서 몸도 못 가누는 나를 돌봐주신 배재완 형님 내외분, 홍천에 사시는 이인의 씨 내외분과 윤근 선생님, 용인 노인전문요양원의 최옥분 원장수녀님과 직원들.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30년의 세월 때문인가?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이상하리만큼 고맙고 미안하다는 생각이 내 안에 꽉 차올랐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사제라는 것 말고는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는 위인이다. 나야말로 남보다 더 바르게 착하게 살지도 못했다. 그분들이야 직업상 또는 신분상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루가 17,10)이라 하더라도 나까지 덩달아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어찌 해야 옳은가? “중요한 건 마음이니 마음으로만 감사하면....”은 절대 용납이 안됐다.
나는 주머니를 털어 성의를 다해 선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일일이 찾아다니며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제야 조금 철이 들었나? 천만 다행한 일이다. 나이 먹은 덕분일 게다. 다른 이유가 없다.
생각해보면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산다.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는 무슨 방법으로든 반드시 고마움을 전한다. 별난 일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나를 포함한 우리 사제들은 안 그랬다. (아,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우리는 습관처럼 받고 신자들은 바쳤다. ‘하느님께 감사’는 우리의 입버릇이었다. 이것이 열 번 스무 번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뭔가를 받지 못하면 서운하게까지 된 것이다. 이거 정말 큰 병 아닌가?
호인수 2007-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