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이 되어도 좋지 아니한가
지금껏 서른일곱 해를 살아왔다. 그 가운데 앞머리에 있는 스무 해의 배경은 처음에는 신앙촌, 그 다음에는 순복음이라는 묘한 기독교였다. ‘기독교’ 하면 당연히 목사와 설교로 대표되는 개신교였다. ‘가톨릭’ 하면 그저 하얀 머리의 교황과 관련된 먼 나라의 일이었다.
그 묘한 기독교는 스무 해 동안 나에게 죄책감과 강박증을 선물로 주었다. 그저 못나고 모자라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투성이였다. 방학 때마다 수련회가 다가오면 방언을 하지 못할까 봐 괴로웠고, 길거리에 나가 노래 부르고 주보를 나눠 주지 않는 내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알던 교회, 기독교, 예수와는 다른 또 하나의 얼굴이 내 주위에 떠돌기 시작했다. 교회 선배가 권해 주던 조금 다른 색깔의 기독교 책에서, 신문사 선배가 읽으라고 한 사회과학 책에서, 90년대 초반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하나같이 몸을 피하던 어느 곳에서 그 얼굴은 불쑥불쑥 나타났다.
그 얼굴 가운데 자주 발견하게 된 이름이 바로 ‘천주교’였다. 크리스마스 때면 텔레비전을 통해 보던, 권위적이고 장중한 음악으로 예배드리는 모습, 먼 나라의 가톨릭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다른 얼굴은 내게 죄책감도 강박증도 안겨 주지 않았다. 평등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예수였고, 교회였고, 기독교였다.
요 몇 년 사이에는 다양한 얼굴들을 보게 되었다. 가톨릭의 이름으로 세계를 누비며 짱돌을 던지는 사람도 보았다. 결혼을 하고, 사돈의 팔촌까지 한 분도 빠짐없이 교회를 다니는 처가 식구들이 생겼다. 한 친구는 일요일이 아닌 날에도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보고, 공부를 하면서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교회에는 나가지 않지만 신앙을 키워 나가고, 공동체를 꾸리는 사람들 얘기도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여자 후배 한 명이 새롭게 신앙을 갖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또 다른 여자 후배 한 명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또 다른 여자 선배 한 명도. 새로 알게 된 여자 선배 한 명은 꽤 오랫동안 성당에 다녔다고 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후반까지의 여자. 나름대로 생계를 꾸려 갈 만하고, 도시 문화를 즐길 줄 아는 여자. 그들이 주말마다 발길을 옮기는 성당은 혹시 또 하나의 문화 공간, 유행이나 패션이 아닐까 생각했다. 품위 있고, 지혜롭고, 영성이 가득한 그 어떤 곳을 찾아가는 것은 아닐까 했다.
아는 어떤 여자 선배의 이야기다. 아는 어떤 여자 선배는 2년여 전 집안에 큰일을 잘 극복해 내고 나서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자기만 옳다며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거나 자신의 복만을 바라는 개신교와는 달리, 용서하고 사랑하고, 실천하며 함께 살기를 ‘강론’하는 성당이, 아는 어떤 여자 선배에게는 힘이 되었다.
설교(說敎)와 강론(講論)의 거리는 곧, 미신이라며 밤 사이에 천하대장군의 목을 베는 행위와 우리의 제사도 전통이고 예절이라고 인정하는 마음 사이의 거리다. 교회 안에서 복을 달라고 박수 치고 소리 지르고 목 놓아 회개하기보다는, ‘미사’라는 엄숙한 의식 안에서 기도하면서 평온을 얻고, 고요한 아름다움을 얻어 나오는 길을 택했다.
아는 어떤 여자 선배에게 교회는 외로움을 덜어 주거나 위무를 받는 액세서리가 아니다. 자신을 낮추고, 사랑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며 실천하도록 해주는 공동체이다. 불교이건 개신교이건 상관없다. 아는 어떤 여자 선배에게는, 법경 공부 하시고 보시도 꾸준하게 하는 이모도 개신교회를 다니는 올케도 다 보기 좋다. 서로가 기대고 보듬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종교도 다 아름다워 보인다.
예전에는 정말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못할 일은 없고,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아는 어떤 여자 선배는 자신이 굉장한 미물임을 안다. 그러기에 가톨릭 안에서 함께 봉사하며 건강하게 사는 길을 발견했다.
지하철을 타면 한 칸의 절반 이상은 휴대폰을 보고 있거나 음악을 듣고 있거나 오락을 하거나 영상을 보고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시민들의 싸움은 지상과 지하 어디에서도 계속된다. 지상에 나와도 내 눈은 내 귀는 쉬지 못한다. 모두가 소리 질러 자기 이야기를 하거나,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으려 이어폰을 꽂고 있다.
2008년, 승자독식, 부익부 빈익빈이 더욱 더 극한으로 내달리고 있는 한반도. 지독한 10:90의 사회, 아니 1:99의 사회. 99의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생계를 꾸려 갈 만하고,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되면 좋겠다. 공연장보다는 품위 있고, 도서관보다는 쌍방향의 지혜가 있으며, 백화점보다는 영성이 가득한 곳이 성당이라면, 유행이 되어도 좋겠다.
그만큼 시끄럽기에, 혼자이기에, 나누지 않기에, 용서하지 못하기에, 사랑하지 못하기에, 듣지 않기에, 품지 못하기에…….
/정우진 '낮은산 출판사'에서 책 만드는 사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