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든든한 ‘빽’으로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자기 경험을 일반화시키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지만, 사람이란 자신이 직접 만나거나 겪은 사람을 통해 그 사람이 속한 배경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가톨릭 교회’란 어려운 주제를 요청받았을 때 먼저 든 걱정은 이것이다. 하지만 할 수 없이 내가 겪어본 사람을 중심으로 가톨릭교회를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먼저 좋은 점을 얘기하자면 소위 ‘전도’를 하려 들지 않는다는 게 좋다. 내가 전도 대상이 된다는 부담 없이 인간의 본질이나 절대자의 존재 등에 대해 자유롭게 얘기 나눌 수 있을 때가 좋다.

 그리고 교회가 가진 자원을 나누려 할 때가 좋다. 예를 들어 가톨릭 소유 시설 등을 종교 활동을 목적으로 한 행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인권단체 등의 활동에 기꺼이 내줄 때이다.

 이 좋은 점은 내가 겪은 가톨릭교도가 그런 자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좋은 점을 뒤집어 본다면 나쁜 점이 된다. 즉 비종교인을 전도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렇게 취급하는 것,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교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 종교 활동을 강제하는 것이다.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학교들이 사유화에 열중하고 공교육의 의미에 부응하지 못할 때 교육을 시종 삼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또한 종교 활동이 목적이 아니면 교회가 갖고 있는 자원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한 예로 인권영화제가 초창기에 당국의 탄압으로 상영장소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을 때, 마지막 희망이었던 것은 가톨릭교회가 소유한 강당이었다.

 평소 시민 대상의 문화행사를 많이 하는 곳이었고 가톨릭교회니까 ‘인권’을 받아주리란 희망을 가졌던 것이었는데 가톨릭 교인이 아니고 종교활동이 목적이 아니기에 대여할 수 없다는 최종 통보를 받았다. 이럴 경우 ‘(종교단체는) 땅도 많고 건물도 많으면서, 경치 좋은 곳에 좋은 시설은 다 차지하고 있으면서...’라는 식의 볼멘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요즘 수배자 문제로 사람들 입에 오른 명동성당 문제도 그렇다.

 비신도로서 갖는 기대는 이런 것이다. 인간의 보편적 자유를 지지하는 속에서 자신들의 종교의 자유를 생각하고 품어줬으면 하는 것이다. 폭염과 혹한 속에서 수없이 명동성당을 오르내렸던 경우를 생각하면, 그 속에는 언제나 자유와 생존을 억압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명동성당을 향한 길을 걸을 때는 신성한 기분이 든다.

 ‘불편하다’거나 ‘주인이 싫다는데’라는 소유권 의식을 발동하는 것은 그 신성한 기분에 찬물을 끼얹고 밖에 세워두고 빗장을 질러대는 것 같다.

 개인적으론 이런 경험도 있다. 인터뷰를 정식으로 요청받은 것도 아니었고, 명동성당 집회 현장에서 말을 걸어온 사람에게 이런 식의 말을 한 것이 기사화가 돼서 항의글을 엄청 받은 적이 있다. ‘교회는 우리 건데 니가 뭔데’라는 항의였다.

 교회는 물론 신도들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모든 소유에 대해서 ‘정의’를 잣대로 그 몫과 사용법을 판단하지 않는가?

 개인적으로 종교가 없지만 그러면서도 종교의 큰 힘은 위로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을 늘상 대면하는 삶을 살고 있다. 원래 종교인이 아니었으나 너무 많은 상처를 대면하고 때론 악다구니를 써야 하다 보니 자신의 영혼이 황폐해져서 가톨릭교회를 찾았다.

 문제는 그런 위로가 사회운동에 대입될 때이다. 어떤 활동을 종교단체와 같이 하다보면 ‘끝까지 갈 수 없다’라는 푸념이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겪는 수많은 사회적 갈등은 화해와 타협으로 봉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때가 많다.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수탈하는 경우에 섣불리 화해와 타협을 얘기하는 것은 결국 강자의 편을 드는 것이 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끝까지 가보려는 사회적 약자에게 화해와 타협, 때론 용서를 얘기하는 것이 교회를 찾은 신도가 구할 수 있는 궁극적인 위로가 될지언정 사회운동에서는 김빼기가 되어버릴 수 있다. 더구나 교회의 권위를 등에 지고 그런 중재자 구실을 하고 나설 때 더욱 그렇다. 중재는 애매한 중도가 되어버리기 싶고, 중도는 중도가 아니라 강자 편을 드는 것과 같을 때가 있다.

 가톨릭교회의 이름으로 사회문제에 개입하고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요구되는 일이다. 하지만 과도하게 ‘중재자’를 자임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인권운동을 하는 특성상 내가 겪는 사람들은 대개 자율성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것이라면 ‘위계상 어쩔 수 없다, 평신도의 발언은 한계가 많다’라는 말을 자주 하며 움츠러져 있다. 반면 ‘교회에 가면 자신을 너무 떠받들어서 자신이 타락할까 겁이 난다’는 분(성직자)도 있었다. 가톨릭에서는 선후배가 철저하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교황이 한마디 하면, 주교가 한마디 하면 끝날 텐데’라는 말을 들을 때 비신도인 나로서는 무시무시하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 내에서는 민주주의란 게 어떻게 얘기되는 것인지 궁금하다. 위계와 질서에 의한 복종이나 충성과 내면에서 나오는 헌신은 다를 것이라 생각된다.

 가톨릭에 몸담은 분들은 소위 ‘빽이 든든한’ 사람들이다. 하느님이라는 ‘빽’보다 더 든든한 ‘빽’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그 ‘빽’을 불의에 대한 저항에 사용할 때는 좋아 보이지만, 자기 방식의 도덕을 강요하고, 사회적 약자를 구별하는데 사용할 때는 무섭다는 것이다. 사회적 약자와의 연대와도 차별이 있다. 예를 들어 어린이와 가난한 자와의 연대는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도덕적으로 이들과 연대하는 걸 뭐라 하는 사람 없고 오히려 칭찬받을 것이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질시받고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이다. 가톨릭교회는 신앙의 이름으로 그런 질시받고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들의 권리 향상을 위한 시도를 가로막을 수도 있다. 이럴 때 교회의 ‘빽’이 발휘되면 정말 어려운 상황이 펼쳐진다.

 하느님의 든든한 ‘빽’이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세상에 쓰이기를 비신도로서 갈구한다.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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