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트럼프 행정부가 폭주하고 있다. 전 세계 교역 상대국에게 고율 관세를 일방적으로 부과해 자유무역 질서를 붕괴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 일본에게는 관세율 인하를 조건으로 현금 투자를 강요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에게 25퍼센트 관세를 15퍼센트로 낮추는 조건으로 3500억 달러(약 486조 원)의 현금 투자를 요구하고 있다. 이미 일본은 5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 펀드를 조성해 투자의 재량권을 미국 정부에 넘기고, 수익의 90퍼센트를 미국이 갖는 양해 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다. 미국은 이러한 일본 모델을 한국에게도 강요하고 있다. 미국 정가에서도 무리하다는 목소리가 나올 만큼 터무니없이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요구다.

한국이 3500억 달러의 대미 투자를 트럼프 임기 내에 완료하기 위해서는 매년 1000억 달러(138조 원)를 미국에 주어야 한다. 이 액수는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5.3퍼센트로서, 정부 예산의 21퍼센트에 이르고 국방비의 2.3배에 달한다. 미국의 요구는 1921년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에게 승전국들이 부과했던 전쟁 배상금 1320억 마르크를 연상케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 친구와 적국으로부터 갈취당했다”라고 했는데, 3500억 달러는 지난 세월의 갈취에 대한 배상금인 셈이다.

트럼프 폭주의 원인

트럼프 행정부는 왜 이렇게 폭주하는 걸까? 트럼프가 주창하고 있는 ‘미국 우선주의’는 정치적 현실주의로 나름 합리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자원이 제한적이고 중국의 지정학적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 미국은 한정된 자원을 중국 봉쇄 등 자신의 국익 추구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국가 부채가 29조 달러에 이르고 연방 정부의 적자가 GDP의 6퍼센트에 달하는 상황에서, 이제 더 이상 전 세계의 분쟁과 지구 차원의 위기 해결을 위한 다자적 노력을 선도하는 자비로운 패권 국가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인식이다. 유럽, 일본 등 미국의 동맹국들도 더 이상 미국에 기대지 말고 방위비를 인상해 자신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지라고 한다.

하지만 정책 집행 과정에서 혼선이 생기고 있다. 트럼프의 정책은 정책들 간에 또 정책의 목적과 수단 사이에 서로 어긋나고 상충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 사태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업 유치 정책과 이민 정책 사이의 충돌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트럼프는 사태 초기에 법대로 집행한 게 무슨 문제냐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다가, 며칠도 안 돼 귀국하지 말고 공장을 마저 지으라고 사정하는 촌극을 연출했다.

2016년 3월 19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가&nbsp;애리조나주 파운틴 힐스의 파운틴 공원에서 열린&nbsp;선거 유세에서&nbsp;지지자들과 연설하고 있다. (사진 출처 =&nbsp;commons.wikimedia.org)
2016년 3월 19일, 미국 도널드 트럼프가 애리조나주 파운틴 힐스의 파운틴 공원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마가 모자를 쓰고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사진 출처 = commons.wikimedia.org)

왜 이런 혼선과 폭주가 발생하는 걸까? 극우 성향의 마가 진영 때문이다. 마가(MAGA, Make America Great Again) 진영은 트럼프 행정부의 폭주를 주도하며, 정치적 현실주의인 ‘미국 우선주의’의 합리성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폴 케네디는 "강대국의 흥망"에서 미국은 지리적 규모와 인구, 자연 자원에 비춰 세계의 부와 힘의 16-18퍼센트를 차지하는 게 마땅한데, 유리한 역사적 · 기술적 환경 때문에 전성기인 20세기 중순에 40퍼센트까지 소유했다가, 그 후 자연스럽게 쇠퇴 과정을 걷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은 쇠퇴하더라도 그 규모 때문에 먼 미래에도 여전히 다극 체제의 매우 중요한 강대국으로 존속할 것으로 예측했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이러한 흥망성쇠의 자연 법칙을 받아들인 현실주의인데, 마가 진영의 인식과 행태는 전혀 딴판이다. 마가는 미국 사회에 일고 있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배경으로 이민자와 외국을 혐오하고 배제시키자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마가는 미국의 모든 어려움이 중국 때문이고 이민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미국 조야에 ‘지배세력 증후군’이 만연하다. ‘지배세력 증후군’은 그레이엄 엘리슨이 "예정된 전쟁"에서 신흥 세력의 부상에 따른 지배 세력의 두려움을 언급하며 사용했던 용어다. 새로 떠오르는 신흥 세력이 높아진 자의식을 바탕으로 국제적 인정과 존중을 기대하고 자신의 힘에 걸맞은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때, 기존 지배 세력은 상대적 쇠락을 경험하며 공포와 불안감을 갖게 돼, 이 같은 신흥 세력의 주장을 불경하고 배은망덕하며 도발적이고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중국은 2024년 기준으로 경제 규모(GDP)에서 미국의 64퍼센트에 이를 만큼 바짝 뒤를 쫓고 있다. 양국의 경제성장률을 감안할 때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더욱이 구매력 평가(PPP) 기준으로는 이미 미국을 앞질렀다. 중국은 제조업에서 미국을 압도하고 있으며, 인공지능 등 첨단 산업 분야에서도 미국의 최대 경쟁자다. 더욱이 중국은 시진핑 집권 이후 ‘부유하며 강하고 존중받는 중국’이라는 차이나 드림으로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 시진핑은 급기야 2024년 “아시아의 일을 다루고, 아시아 문제를 해결하고, 아시아의 안보를 지키는 일을 맡아야 할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이라며, 미국의 퇴장을 요구했다. 20세기 초에 서반구에서 영국의 역할이 점차 희미해져 갔듯이, 아시아 지역에서도 미국의 역할 역시 제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중국의 주도권을 인정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미국인들의 문화적 우월감 탓에 결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힘들 것이라고 단언한다. 마가 진영의 폭주는 ‘지배세력 증후군’에 바탕한 피해망상이다.

공공 외교 활성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이 거세다고 터무니없는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우선 협상 당국자들이 두둑한 배포와 창의력으로 소나기를 피하면서, 국익 손실을 최소화시킬 지혜를 짜내야 한다. 다음으로 공공 외교를 가동시켜 미국 조야에 한국민들의 여론을 전달해 트럼프 행정부의 무리한 요구가 미국의 중장기적 국익에 해가 됨을 납득시켜야 한다. 대기업뿐 아니라 가톨릭 주교회의의 한미 연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연대 창구 등도 한국의 여론을 미국에 전달할 수 있는 좋은 통로다. 이번 기회에 정부와 민간이 함께 협력해 공공 외교를 활성화한다면 한국 외교의 역량도 커질 것이다. 공공 외교 활성화는 미국의 마가 진영과 관계를 구축해, 우리 사회를 교란시키고 국익을 해치고 있는 한국의 극우 진영을 약화시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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