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공동선>(www.comngood.co.kr)에 함께 실렸습니다. - 편집자
일본군 ‘위안부’를 지우고 모욕하는 이들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을 맞은 지 80년이 되는 해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점령하면서 여러 폭력과 탄압, 수탈을 자행했지만, 그중에서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국가가 조직적으로 자행한 전시(戰時) 성폭력이라는 중대한 전쟁 범죄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 심각한 인권 침해 범죄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며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지만, ‘위안부’ 여성들은 전쟁 범죄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이들에게 집단 학살을 당하거나 겨우 살아남았더라도 끔찍한 수치와 두려움 속에서 오랫동안 그 사실을 드러내지 못했다.
깊은 침묵 속에 숨겨졌던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사실은 해방 후 30년이 지난 1975년, 전쟁이 끝나고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오키나와에 머물던 배봉기 할머니가 강제 추방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것을 증언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된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다. 일본 정부가 “일본군은 군대 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라고 발표하자, 이에 격분한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8월 14일, 국내 거주자로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하며 일본군의 만행을 고발했고, 이 문제에 대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한 수요 시위도 1992년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각지에서 유사한 증언이 잇따르고,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1993년 8월 일본 정부는 ‘위안부’ 동원과정의 강제성과 군의 개입을 처음으로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1965년 체결한 한일기본조약으로 이미 전후 보상 의무를 청산했다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거나 사죄하지 않았다. 또한 일본 사회가 점점 우경화되면서 아베 신조 전 총리와 같은 이들은 “위안부 문제는 신빙성이 의심된다”라며, 사실 자체를 왜곡하고 부인하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국 사회에도 극우주의자들이 늘어나면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 시위’가 열릴 때마다 옆에서 확성기를 켜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단 1명도 없다며 사기극이라고 주장하고, 집회를 방해한다. 이들은 전국에 설치된 소녀상을 돌며 100건이 넘는 모욕 행위를 하기도 했고, 올해 5월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수요 집회를 방해하지 않도록 조처하자, 피해 생존자의 집 앞까지 찾아가 일장기를 흔들며 모욕 발언을 쏟아내기도 했다.
전쟁 도구가 되거나 상으로 주어지는 여성의 몸
전쟁 중 여성이 집단 성폭력을 당하거나 전리품처럼 다뤄지는 일은 과거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되는 비극이다. 이러한 비극은 구약 성경에도 나온다. 판관기는 “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임금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제 눈에 옳게 보이는 대로 하였다.”(판관 21,25)라는 마지막 구절처럼, 이스라엘의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시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마지막 부분인 19-21장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한 지파인 벤야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 사이의 전쟁 이야기가 나온다.
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을 다룬 19장은 에프라임 산악 지방에서 나그네살이 하던 한 레위인의 소실을 소개한다. 이 여인은 남편에게 화가 치밀어 올라서 친정인 베들레헴으로 가 버렸고, 넉 달쯤 후 남편이 그를 데리러 오자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벤야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한 노인이 이 부부를 자기 집에서 머물게 했는데, 불량한 남자들이 찾아와 재미를 보겠다며 그 집에 든 남자를 내보내라고 요구했다. 집주인 노인은 남자 대신 자신의 처녀 딸과 손님의 소실을 내보낼 테니, 그들을 욕보이면서 당신들 좋을 대로 하라고 설득한다. 그래도 그들이 말을 듣지 않자 레위인은 자신의 소실을 붙잡아 그들에게 내보냈고, 남자들은 그 여자를 밤새도록 강간하다가 동이 틀 때야 놓아 보냈다. 레위인은 다시 길을 떠나려 집 밖으로 나서다가 소실이 문간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여인을 나귀에 얹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 소실의 몸을 열두 토막으로 잘라 낸 다음에 이스라엘 온 영토로 보내 기브아인들의 불의를 고발한다.
20장은 이 고발에 이스라엘 온 공동체가 미츠파에 모여 회의를 열고, 벤야민 지파에게 그 불량한 사람들을 넘기라고 요구하지만, 이를 따르지 않자 전쟁이 벌어진 이야기다. 벤야민 지파는 전투 중 도망쳐 겨우 목숨을 연명한 패잔병 600명을 제외하고 모두 다 죽었다. 이에 21장은 절멸의 위기에 처한 벤야민 지파를 재건할 수 있도록, 살아남은 남자 600명에게 아내를 구해 주는 이야기를 전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무도 벤야민 지파에게 자기 딸을 아내로 내주지 않겠다고 맹세했기에, 미츠파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야베스 길앗을 공격해 모두 죽이고 처녀만 살려 벤야민 사람들에게 아내로 준다. 그 여인들이 400명이라서 200명이 모자라자, 실로에서 열리는 주님의 축제에 참여하는 처녀들을 납치해 아내로 삼으라고 명한다. 벤야민 자손들은 춤추는 여자들을 납치해 골라 가지고, 자기들의 상속지로 떠나갔다.
주목하지 않는 여성의 희생과 고통
판관기 19-21장에 관한 전통적 성경 해석은 이스라엘에 왕정이 수립되기 전 빚어진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에 초점을 둘 뿐, 그 과정에서 희생된 여성의 피해나 고통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벤야민 지파 기브아 사람들의 죄악을 강조하며, 이들을 심판하여 공동체의 정의를 회복하고자 했음을 강조할 뿐이다.
우선, 전쟁의 발단이 된 기브아인들의 만행에 대해서 그들이 레위인을 욕보이려고 했던 점이나 남편이 있는 여인을 간음해 죽게 한 죄를 지적할 뿐, 그들에게 자신의 딸을 내어 주려는 노인이나 자기 소실을 내어 준 레위인의 처사를 비열하게 보거나 문제 삼지 않는다. 이들은 손님을 보호해야 하는 집주인의 의무에 충실하거나, 집주인의 난처함을 헤아려 소실을 내어 준 불가피한 상황으로 이해할 따름이다. 어떤 성서 번역본에서는 레위인을 옹호하려 하는 것인지, 그 소실이 친정으로 돌아간 이유를 두고 “화가 치밀어 오르다”라는 의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창녀 짓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용례를 이용해 간음하다가 남편을 떠났던 소실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니 남편이 소실을 내어 준 것도 이해할 만하다는 식으로 여지를 둔다.
벤야민 지파를 재건하기 위해 야베스 길앗 사람들을 학살하고 처녀들을 아내로 내어 주는 처사나 실로 처녀들을 납치하는 비윤리적인 방식에 대해서도 강제 결혼하게 된 여인들에 대한 연민보다 벤야민 지파가 존속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공동체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를 위해 죽임을 당한 야베스 길앗의 주민들은 맹세를 어기고 미츠파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대가를 치른 것이고, 혹자는 실로의 처녀들이 주님의 축제가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신을 위한 축제에 참여했던 이들이라고 해석하며 납치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이런 해석에서는 희생자 여성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들의 고통이 어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레위인 소실의 토막 난 몸은 이스라엘 지파를 결집하는 도구가 되었고, 야베스 길앗과 실로의 처녀들의 몸 역시 베냐민 지파를 재건하는 도구가 되었을 뿐이다.
성폭력에 희생된 여성을 기억하고 재해석하기
현대의 시각으로 판관기 19-21장을 읽을 때, 독자는 아무리 남성 중심적인 가부장 사회였던 고대 이스라엘 시대, 그것도 전쟁 상황이라는 특수한 배경을 염두에 두더라도,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살해, 납치, 결혼 강요가 정당화되고 여성의 고통은 철저하게 지워지는 서사의 잔인함과 폭력성에 큰 충격을 받는다. 이 때문에 여성신학의 관점으로 이 본문을 해석하는 이들은 여성이 철저히 도구화되고 대상화된다는 점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특히 자신의 소실을 성폭행당하도록 내어 주어 희생시키는 레위인의 무책임함이나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고 재건하는 과정에서 여성을 재생산의 도구로만 여기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부장적 행태를 문제 삼는다. 그리고 이를 단순히 임금이 없던 시절의 혼란을 보여 주는 서사로만 읽지 않고, 남성의 소유이거나 남성의 결정에 따라야만 하는 이름 없는 여성들의 고통과 희생을 주목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한 여성에 대한 혐오와 폭력, 성차별 등의 문제를 기억하고 바로잡도록 촉구한다.
특히 구약학자 이영미는 이 본문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경험과 연결하여 해석한다. 레위인을 보호하기 위해 성폭력에 내몰린 레위인의 소실이나 강제 결혼을 위해 집단으로 납치된 야베스 길앗과 실로의 여인들의 처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희생과 같을뿐더러, 전쟁 상황에서 공동체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며 추방당하고, 이들에 대한 기억과 해석 역시 지파나 민족, 국가라는 거대 담론에 희생되어 대상화되거나 도구화될 뿐이라는 점에서 아주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고 복원하는 것은 유사한 사건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사라져야 할 여성 혐오와 성폭력
지난 제21대 대통령 선거 기간 중 정치 분야 TV 토론회에서 이준석 후보가 여성의 신체에 대한 폭력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발언을 하여 크게 문제가 되었다. 전 국민이 지켜 보는 공개 정책 토론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적이고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혐오 발언을 하고도 문제의식이 없는 정치인과 이에 동조하는 지지자들을 보며, 일본군 ‘위안부’를 모욕하는 것을 일부 극우주의자의 일탈 행위로만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우려가 든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었던 역사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성폭력과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서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전시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어 전시 성폭력을 고발하고 이를 기억하는 것은 전쟁과 여성 폭력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행동이다. 여성을 모욕하고 혐오하는 행태도, 또 그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과 희생의 역사를 왜곡하거나 지우려는 시도도 더는 용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영
편집위원,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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