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 1 ] 역사 현장 순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지난 12-21일 북아일랜드에서 ‘2025 가톨릭한반도평화포럼’을 진행했다.
2017년부터 해마다 열린 이 공개 토론회는 한반도 평화 구축을 위해 다른 나라의 가톨릭교회 및 평화 단체와 연대하고, 이에 대한 청년들의 참여를 모색해 왔다. 2022년부터는 한, 미, 일 3개국 교회가 만나 평화 구축을 위한 논의를 했다. 지난해부터는 국내 평화 단체와 연대해 청년들의 체험과 대화의 장을 열고 있다.
지난해 피스모모와 협력한 데 이어, 올해는 ‘어린이어깨동무’와 함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어린이어깨동무는 1996년 북한이 큰 수해를 겪은 당시 시작해, 인도적 대북 지원과 평화 교육 사업을 하고 있는 비정부기구(NGO)다. 특히 남과 북의 어린이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살아가는 모습을 지향하면서,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의료, 교육 등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다. 또 북아일랜드를 비롯한 각국과 평화를 위한 해외 교류 사업도 펼치고 있다.
이번 평화 포럼에는 어린이어깨동무와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를 통해 대학생, 청년, 사제, 이은형 신부(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장)와 안내자 김동진 교수(트리니티 칼리지 국제평화학 겸임교수) 등 20여 명이 참여했다.
일정은 13-14일 이틀간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와 데리, 북아일랜드 수도 벨파스트의 여러 역사와 평화 운동 현장을 방문하고, 15일부터 6일간 코리밀라(Corrymeela) 공동체에서 ‘희망 가꾸기’ 프로그램 참여로 진행됐다.
이번 포럼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역사와 현재를 배경으로 열리게 된 것은 아일랜드와 영국령 북아일랜드가 겪은 식민지 역사와 분쟁, 통일, 지금까지 이어지는 평화 과정 속에서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 간 갈등 문제를 비춰 보고 배우며, 평화의 상을 상상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한반도를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라고 말하지만 사실상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를 비롯해 지구상 많은 나라가 여러 양상으로 갈라지고, 분쟁과 갈등을 겪으며 평화를 이뤄 내려는 노력을 이어 오고 있다.
다른 하나는 평화 과정, 평화 구축에 대한 이해다.
평화학을 공부하고 가르쳐 온 김동진 교수는 이번 포럼을 준비하면서, “평화 프로세스라는 말이 정치인이나 정부 고위급의 협상, 남북의 지도자가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평화프로세스는 정치 협상만이 아니라, 종교계를 비롯한 각계 시민 사회와 다양한 단체와 공간, 시민들이 함께 지속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며, “국가 간의 일로 보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평화 프로세스를 사람이 사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것인가이며, 다른 나라의 상황을 보고, 듣고,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분쟁과 평화 과정으로 본 아일랜드의 역사
1998년 맺은 평화 협정에도 현재까지 이어지는 아일랜드의 갈등과 분열, 반목의 역사는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일랜드를 침략한 영국은 노르만-아일랜드계 봉건 영주를 통해 간접 지배했고, 그 영향력은 아직 아일랜드 전역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16세기 영국 헨리8세가 아일랜드 왕을 겸하고 직접 통치를 시작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6세기 중반 영국은 식민지 정책 중 하나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출신 개신교도들을 아일랜드로 이주시켰다. 이들은 북부 얼스터 지방에 정착하면서 지배층이 됐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 가톨릭계는 토지 소유, 의회 참여, 교육 등 전반 범위에서 지속적 차별을 받았고, 17세기 영국의 아일랜드 지배권을 둘러싸고 가톨릭계(토착민)와 개신교계(봉건 영주, 이주 세력)의 충돌이 격화됐고, 아일랜드인들은 끊임없이 저항했다. 이 과정에서 1845년부터 7년간 발생한 대기근으로 아일랜드 인구 10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이 이주하는 상황을 영국이 방관한 일은 여전히 아일랜드에게 가장 아픈 상처다.
1921년 말,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이뤄져 아일랜드는 자유국이 됐고 1949년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영국계 신교도가 다수였던 아일랜드 북부의 6개 주는 영국령으로 남아 북아일랜드가 됐다.
1968년부터 영국의 차별에 항의하는 시민권 운동이 시작되고, 1969년부터는 급진파 아일랜드 공화군(IRA)의 활동도 본격화됐다. 북아일랜드 신교도계도 민병대를 조직해 대항하면서 양측 간 무장 충돌이 일어났다. 이 시기부터 벨파스트 협정이 이뤄진 1998년까지를 이른바 ‘북아일랜드 분쟁’이라고 부른다.
1972년 1월,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리는 북아일랜드 ‘데리’(Derry)의 유혈 사태. 당시 영국 정부군은 시위대에 발포해 13명이 사망했고, 무력 충돌이 격화되면서 영국은 북아일랜드 자치권을 회수했다. 이 사건 이후 29년간 약 3200명이 사망했다.
오랜 비극을 겪고 나서야 영국과 아일랜드는 무력 충돌의 평화적 해결을 시도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7년 IRA가 휴전을 선언하고, 신교도 과격파들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국면이 전환됐다. 1998년 4월, ‘성 금요일 협정’(GFA, 벨파스트 협정)으로 불리는 북아일랜드 평화 협정이 체결됐다. 이 협정으로 1972년부터 영국이 가졌던 입법, 행정권을 북아일랜드가 되찾았고,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된 ‘국경위원회’가 설치됐다. 그리고 위원회는 지속적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북아일랜드의 다양한 정파가 참여하는 민주적 자치 정부 구성을 합의했다.
자치 정부 구성을 위한 1998년 총선. 성 금요일 협정을 주도한 얼스터연합당(신교도 온건파)과 사회민주노동당(가톨릭 온건파)이 승리했다. 이 총선 결과로 다양한 평화 정착 정책, 양측의 화해와 공존을 위한 평화 교육도 본격화됐다. 그러나 2003년 총선에서는 1998년과 달리 양 진영(신교와 가톨릭)의 강경파가 이기고, 이후 브렉시트 등의 변수가 생겨나면서 아일랜드의 평화를 위한 노력은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다.
북아일랜드 분쟁은 민족적, 종교적 갈등으로 보이지만, 그 본질은 더 깊은 정치적 차이다. 또 “아일랜드 민족주의에 기반한 가톨릭계와 영국 통합주의를 지지하는 개신교계 사이의 권력다툼”이면서, “어떤 국기 아래에서 살 것인가라는 정체성의 갈등, 오랜 차별로 인한 계급적 불만”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분쟁이다.
식민 지배, 무력 충돌과 진압, 갈등과 상호 소외, 수많은 죽음 그로 인한 정신적 사고 후유 장애의 양상을 보면, 한반도의 근현대사 속 순간들과 겹쳐진다. 북아일랜드의 어린이와 청소년 93퍼센트는 종교, 정치적 입장에 따라 다른 학교를 다니며, 사는 지역도 장벽(피스월)으로 분리돼 있다. 어떤 모습에서는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내 갈등에서 제주4.3의 상처가 보이기도 한다.
김동진 교수는 아일랜드의 평화 협정 과정은 한반도의 7.4 남북 공동 성명, 남북 기본 합의서, 6.15 공동 선언 등과 비슷한 시기와 흐름에서 이뤄졌지만, 차이는 평화 협정을 맺었느냐의 여부라고 말했다. 그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평화를 지향하는 생각은 상당히 비슷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남북이 차이는 인정하면서 평화 공존을 말했듯, 아일랜드 역시 통일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 열망을 인정하면서 평화 프로세스를 제도화하기 위해 국민 투표를 하고 국경을 열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15일 코리밀라 공동체에 도착하기 전까지 참가자들은 트리니티 대학, 피스월, 데리 성벽, 린넨홀 도서관, 벨파스트 시청, 알시티, 던루스 성 등을 돌아보며, 그 속에 담긴 분쟁과 평화의 여정을 들여다봤다. 트리니티 대학에서는 평화학 석학이자 활동가인 주드 랄 페르난도 교수와 간담회도 가졌다.
평화의 벽 – 피스월
북아일랜드 분쟁 동안 서로 상대방 주거 지역에서 무장 충돌을 일으켰다. 이를 막기 위해서 영국군, 정부, 때로는 시민들이 북아일랜드 곳곳에 주거지를 분리하는 장벽(피스월)을 세웠다. 대부분의 장벽은 벨파스트에 있으며, 그중에서도 대다수가 북부와 서부에 집중됐다.
벨파스트 서부와 북부는 아일랜드 가톨릭계와 영국 개신교계가 가까이 살고 있는 접경 지역이다. 무력 사태에 대한 일시적 조치였지만, 피스월은 여전히 지역 주민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평화 협정 뒤에도 새로 생기거나 보수되는 곳이 있다. 최근에는 벽 철거와 교류 공간 조성이 점진적으로 이뤄지면서 지역 주민들은 새로운 형태의 관계를 찾아가고 있기도 한다.
데리(Derry) 또는 런던데리
데리 또는 런던데리는 북아일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영국의 이주 정책이 시작되면서 1613년 런던데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식적으로 런던데리를 쓰지만 아일랜드계, 일부 영국 개신교계는 데리라는 이름을 여전히 쓰고 있다.
17세기에 식민지 정책으로 세워진 성벽으로, 이주한 영국 개신교계는 성벽 안에, 아일랜드 가톨릭계는 성벽 밖에 살았다. 데리는 아일랜드 국경과 인접한 곳으로 아일랜드 가톨릭계 주민들이 주로 살고 있다. 1960년대, 차별적 선거구 제도와 주택 정책의 불평등으로 민권 시위가 일어난 곳이며, 당시 영국군의 저격으로 어린아이를 비롯한 시민들이 희생됐다.
알시티(Rcity Youth CIC)
벨파스트의 알시티는 같은 지역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사는 신구교도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평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지역 기반 청소년센터다. 알시티는 ‘Our(R) City’, ‘우리 도시’라는 뜻이다. 개신교도인 앨런(Alan Waite)과 가톨릭교도인 토머스(Thomas Turley)가 설립한 단체로 평화의 벽이 가로지르는 가톨릭교도 지역과 신교도 지역의 경계에서 양측 청소년들이 함께 만나는 공간을 마련했다.
따라서 알시티의 모든 활동에는 다른 종교, 문화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된다. 청소년들은 지역 사회에 남아 있는 갱문화와 폭력, 마약이 아니라 알시티에 와서 서로 만나고 성장할 수 있다. 서로 분리돼 있던 청소년들이 함께 활동하면서 “상대방은 뿔난 악마”라는 편견을 깨고, 과거의 대립과 갈등에서 자유로워져, 지역 사회를 통합하는 목표를 조금씩 이뤄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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