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독재, 반부패 35일, '몬순 혁명' 주역들 한국 방문
지난 7월, 방글라데시에서는 35일간 피로 얼룩진 반독재, 반부패 민중 투쟁이 있었다.
1일 본격화된 이른바 ‘몬순 혁명’은 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7월에 머무르며 35일까지 이어졌다. 36일째 된 날,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인도로 도피하면서 비로소 8월 5일이라는 날짜를 되찾았다. 혁명 기간 동안 사망자는 1500여 명, 부상자 2만 2000여 명에 이른다.
‘몬순 혁명’은 우기인 7-8월, 독재와 부패 척결을 외치며 거센 빗줄기와 함께 거리로 쏟아진 사람들의 모습을 일컫는다.
이번 혁명으로 사임하고 도피한 하시나 총리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주축을 이룬 독립군의 딸이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1996년 방글라데시 첫 여성 총리가 된 뒤, 2009년 재집권해 21년간 재임했다. 내각제인 방글라데시에서는 대통령은 상징적 존재로 총리가 실권을 갖는다.
하시나 총리를 위시한 독립 세력의 독재와 부패를 몰아내기 위한 몬순 혁명이 끝난 뒤, 혁명 세력은 과도 정부를 구성했고, 최고 고문으로 이를 이끌고 있는 이는 ‘그라민 은행’으로 20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무함마드 유누스다.
이번 항쟁의 주축을 이룬 대학생과 청년, 시민들은 독재 체제 이후 민주정과 평화를 위한 중대한 과제를 이행하며, 연대와 지지를 요청하고 있다.
이런 활동 하나로 혁명 주역 3명이 한국을 방문했다. 재일.재러 동부 지원 단체인 무용신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초청으로 찾아온 이들은 11월 4일부터 12일까지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방글라데시 몬순 혁명을 알리고 나아갈 방향을 함께 모색했다.
이를 위해 방글라데시 인권운동가 머스테인 자히르 씨는 무용신 활동가 이고은 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대한민국 시민사회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 소재를 찾아내고, 다음 세대의 상식과 감성에 호소할 수 있는 정신을 일깨웠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한국의 경험을 잘 알고 있기에, 저는 앞으로 방글라데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조언을 얻기에 대한민국보다 더 좋은 나라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1월 9일 서울 합정동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만난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 씨(방글라데시 개헌위원, 몬순 혁명 대변인), 모스피쿠르 라흐만 조한 씨(사진작가), 사미아 악타르 씨(다카대학교 법대생)에게서 혁명 과정과 현재, 향후 과제와 의미에 대해 들었다.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 씨는 “이번 방글라데시 혁명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은 광주 민주화 항쟁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13년에도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있었고, 살상이 있었다”면서, “1980년 광주 민주화 항쟁을 기억하며 방글라데시의 민주화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광주는 우리에게도 정신적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또 “몬순 혁명을 젊은이들이 수행하고 성공했다는 점이 기억되면 좋겠다. 보통 젊은 세대는 정치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흔히 생각하지만, 진짜 중요한 가치에 대해 방글라데시 젊은이들이 명백하고 명확하게 선택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길 바란다”며, “이 경험을 통해 아시아태평양 전역 젊은이들이 인권과 정의가 훼손될 때에 연대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시위 없는 7월 우기에 최초 청년들이 이끈 혁명
“1971년 방글라데시가 독립할 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사회 정의와 인권, 인간 존엄이었지만, 지난 50년간 그러한 가치들이 실현되지 못했다.”
자히르 씨는 몬순 혁명은 젊은이들이 주축이 돼, 권위주의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혁명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방글라데시는 1억 8000여 명으로 세계에서 8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다. 청년층이 50퍼센트인 젊은 나라이기도 하다.
청년층이 혁명에 나서게 된 것은 하시나 정권의 부패와 독재로 인해서였다. 하시나 정권은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 전쟁을 치르고 벵골인들이 방글라데시를 수립할 당시, 독립운동 세력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이들은 장기 집권하면서 부패와 독재 세력이 됐다.
몬순 혁명의 발단이 된 것도 방글라데시가 극심한 실업난을 겪는 가운데, 정부가 독립전쟁 유공자 자녀에 대한 공무원 할당제(공직의 약 30펴센트) 추진이었다. 현재 청년실업률은 약 40퍼센트다. 이미 기득권인 독립 유공자들에 대한 할당제는 청년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또한 독립 운동을 이끌던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과 지아우르 라흐만 두 주요 세력이 서로 반목하는 가운데, 독립유공자 자녀 할당제는 결국 하시나 총리 측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자히르 씨는 지난 50년 동안 여당 아와미가 추구했던 것은 정당의 이익, 하시나 총리 측 독립운동가 가족들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 장관은 국가 돈을 착복해 해외에 300채가 넘는 부동산을 사들인 것이 적발되기도 했다. 이런 부정부패를 감추기 위해 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을 구금, 체포, 납치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러한 부정, 부패로 시위가 종종 일어났지만, 이번 시위가 전국으로 번지고 극렬화된 것은 정부의 폭력 진압과 살상 때문이었다.
방글라데시 매체 <프로톰 알로> 보도에 따르면, 공권력의 발포로 생겨난 최초 사망자 150명 중 94명이 18-24살 청년이다. 다카대학교 중심의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 혁명의 중요한 시작점을 제공한 만큼 젊은이들의 희생이 컸다. 하시나 정부의 공권력은 실탄 조준 사격은 물론, 헬리콥터 사격과 통금, 통신 차단을 한 상태에서 ‘학살’을 방불케하는 진압을 자행했다.
이러한 강압에도 학생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하시나 총리는 8월 5일 헬기를 타고 인도로 도피했다.
“몬순(우기) 시기는 집회나 시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는 예외 상황이 됐고, 거센 비와 함께 거리로 나선 시민들은 하시나 정권을 몰아냈다. 7월 1일 시위가 시작되고 하시나 정권이 물러날 때까지 날짜를 세면서 7월 35일이 됐다. 하시나 총리가 도피하고 사임한 8월 5일 제 날짜를 찾았고, 이 날은 방글라데시의 두 번째 해방절이 됐다.”
여성도 주축으로 시위 참여
혁명 시작 울린 다카대 학생들의 희생
폐쇄, 통신 차단, 무차별 공격에도 저항 멈추지 않아
“당신은 모든 꽃을 다 꺾을 수 있지만, 봄이 오는 것은 결코 막을 수 없다.”(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시 거리의 벽에 쓰인 문구)
다카대 법과대학원생인 사미아 악타르 씨는 여성 리더로 혁명 거리에 있었다. 그는 이 문구가 혁명에 참여한 젊은이들의 마음이자 정신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혁명에서 주목할 것 중 하나는 “여성 참여”로, 이전 시위와 다르게 여성이 참여했고, 또 이전과 다르게 여성에 대한 공격과 탄압도 있었다. 무슬림 국가는 대체로 여성을 보호 대상으로 여기지만, 이번 혁명에서는 예외가 일어난 것이다.
여성들이 특히 주축이 됐던 이유는 하시나 정부의 또 다른 할당제, “여성에 대한 10퍼센트 할당”이었다. 여성들은 이 또한 부당하고 불공정한 제도라며, 더 정의로운 사회 제도를 요구하고 나섰다.
악타르 씨는 “평화 시위를 원했지만 격화된 것은 정부의 폭력 진압 때문이었다. 혁명 흐름을 바꾼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7월 14일 하시나 총리가 학생들에게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은 일”이라며, “이는 학생들을 더욱 저항하게 만들었고, 스스로를 배신자, 반역자라고 칭하며 시위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여학생들의 시위 참여는 더욱 강력한 힘을 불러들였고, 더 많은, 다양한 세력의 참여를 이끌었다.
이미 전국으로 퍼진 시위에 또 한번 불을 붙인 사건은 “첫 순교자”라고 불리는 아부 사예드가 경찰에 사살당한 일이다.
다카대 학생들 시위대가 공격 받던 16일, 영문과 학생인 아부 사예드는 경찰의 총격에도 도망가지 않고 두 팔을 벌린 채 그대로 총을 맞았다. 한낮, 무장도 하지 않은 학생이 경찰의 조준 실탄 사격으로 쓰러지는 장면은 국가 전역으로 퍼져 나가 국민들의 공분을 샀으며, 동시에 무자비하고 잔혹한 경찰 폭력의 시작이 됐다.
이틀 뒤엔 미르 마흐푸주르 라만 무그 학생이 최루탄을 맞은 학생들에게 물을 주기 위해 가던 중, 이마에서 귀까지 관통한 총알에 맞아 사망했다. 그 외에 경찰에 맞고 쓰러지는 이들, 트럭에서 버려진 부상자들의 영상은 전국을 타고 흘렀다.
18일부터 시위의 중심에 있던 대학들은 폐쇄됐고, 통금과 모든 통신이 차단됐다. 언론들도 두려움에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경찰뿐 아니라 하시나 정부 정보 조직(한국의 국정원과 같은)도 움직이며 시위 참여한 시민들을 무차별 공격했다. 시민들은 죽은 가족들의 시신을 든 채 거리로 나설 정도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시민들은 단 하나의 요구 “하시나의 퇴임”을 외치기 시작했다.
악타르 씨는 “결국 7월 35일(8월 5일) 하시나 총리는 사임을 선언하고 인도로 도피했지만, 너무 많은 이의 희생을 겪었다”면서, “많은 이가 눈과 다리를 잃고, 살아 있더라도 영구적 장애를 겪어야만 한다. 어린아이, 시위와 무관했던 이들도 희생됐다. 하시나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 끝이 아니라 우리는 이 희생에 따른 혁명의 정신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시나 정권 동안 실종된 비판자들 찾아나서
과도 정부가 풀어야 할 위험한 난제
조한 씨는 인류학을 전공한 사진작가다. 그는 혁명 이전 대학 시절부터 하시나 정권에게서 납치, 실종된 가족들의 이야기를 사진에 담아 왔다.
“하시나 정권이 물러난 8월 5일, 100여 명 시민이 과도 정부를 준비하는 캠프로 찾아왔다. 그들은 모두 손에 사진을 들고 있었는데, 사진 속 사람들은 하시나 정권 동안 실종된 이들이었다. 어떤 여성은 남편, 어떤 어머니는 두 아들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몇 년째 생사를 알 수 없는 실종자들은 대체로 정권을 비판하던 학자, 언론인, 작가들이었다.”
가족들은 실종자들을 찾게 해 달라고 호소했고, 과도 정부는 이들을 찾기 위해 관련 부서를 만들었다. 실종자들이 발생한 양상을 살펴보면 정부의 선거 시기에 증가했다.
조한 작가는 지난 몇 년간 실종자 가족들 곁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을 잃은 아내, 딸, 어머니들은 외부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지만, 집 안에서 가족들을 기억하고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면서, “활동이 자유롭지 않은 가족들에게는 실종자들의 공간을 그대로 남겨 두는 것, 실종을 인정하지 않는 것 역시 저항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 기록뿐 아니라 실종자 관련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그 자료들이 언젠가, 실종의 전말을 밝히는 데에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종자 가족들은 혁명 전에도 위험을 감수하고 실종 사건을 알리기 위해, 잊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매달 한 번씩 거리로 나섰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조한 씨는 “하시나 정권은 정권 유지를 위해서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었고, 그 방법 하나로 1500여 명을 납치했다. 정당한 사법 절차 없이 살해당한 사람은 약 4400명, 부상자도 2만 5000여 명”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공포 정치에도 ‘나는 총이 두렵지 않다’며 경찰의 총에 쓰러져 간 아브사이드 씨, 맨몸으로 저항한 어린 학생들의 힘이 혁명을 성공시켰다”며, 그렇게 이룬 민주주의를 모두와 함께 실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과도 정부의 개혁 과제는 “책임자 처벌과 피해자 구제, 사회 질서 정상화, 민주정을 위한 온전한 총선”이다.
그러나 이들이 직면한 현실은 만만치 않다. 바로 지난 20년 간 하시나 정부하에 집권했던 이들, 고용된 이들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하시나 총리를 인도가 비호하고 있다는 점, 기존 정부 인사들이 해외로 유출한 자금도 문제다.
무스타인 빌라 자히르 씨는 “하시나 정부가 구축해 놓은 체제가 매우 굳건하다, 통계를 보면 경찰만 해도 50퍼센트가 지난 정권 인사들이며, 행정, 사법, 군부 등도 비슷한 비율이나 그 이상이다”라면서, “하시나 총리도 아직 혁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남아 있는 정부 수뇌부는 제거할 수 있지만, 중간 이하를 모두 해체하기는 어렵다. 이런 위협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 과도 정부의 가장 큰 도전”이라고 설명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s://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