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2주년 희생자들 위한 추모 미사 강론
이 글은 이병호 주교가 지난 29일 전주 인보성체수도회 총원에서 봉헌한 이태원 참사 2주년 희생자들 위한 추모 미사 강론 전문입니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죽음만큼 자연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죽음만큼 자연스럽지 않은 것도 또한 없습니다. 자연스러운 죽음 앞에서는, 심지어 ‘호상好喪’이라는 말까지 쓰며, 우리는 가신 분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 기도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자연스럽지 않은 죽음은, 남은 사람들의 삶을 장례식으로 만들어, 일상의 삶이 불가능하게 합니다. 한창 꽃필 나이의 젊은이가 대부분이던 159명 사망자, 195명 부상자. 전쟁이 나도 이렇게 많은 이가 한꺼번에 희생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온 세상이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 상상할 수도 없는 사고가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습니다. 가족은 물론, 친구들의 삶이 전과 같을 수 없는 충격과 트라우마가 되어 치르지 못한 장례식처럼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2년이 되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멀리서 소식만 들은 우리에게도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되살아납니다. 지금 우리는 이분들을 기억하며 추모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이 말은 5.18 당시 희생된 이들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채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과 죄책감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설에서 이 문장은 살아남은 자들의 깊은 슬픔과 트라우마를 나타내는 핵심적인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그들에게 삶 자체가 끝나지 않는 장례식과 같은 고통의 연속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이 쓴 또 다른 소설 제목입니다.
내가 보내지 않으면 죽은 이는 가지 못합니다. 내 마음속의 구천을 떠도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죽은 이는 떠나지 못하고, 산 이는 보내지 못하여, 구천을 떠도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장례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가 방방곡곡이 별별 명칭의 축제가 생겨나 축제 천국이 되었는데, 이것은 어쩌면 우리 내면의 지옥을 덮기 위한 포장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를 천국이 아니라 지옥으로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점점 늘고 있습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그것을 대변합니다.
최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사회적 부적응-외톨이' 비율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19-34살 청년 가운데 고립 청년의 비율은 5퍼센트로 54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비율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커지는데, 35-49살 5.4퍼센트, 50-64살 6.6퍼센트, 65-74살 8.3퍼센트, 75살 이상 10.5퍼센트라고 합니다. 75살 이상의 노인 10명 중 1명이 사회 적응을 못하고 외톨박이로 극도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살자 비율로 여기에 상응하여 늘어날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자살자 비율이 제일 높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이들에게만 우리나라가 헬조선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연세가 많을수록 외톨박이로 극도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시는 분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도 주변 사람들이 함께해 주고 아파해 주면, 그 고통을 견디어 내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하느님나라는 남의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을 나의 것처럼 느끼고 함께해 주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사고는 날 수 있고, 불행은 언제나 들이닥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책임을 느끼고 미안함을 표명하며 뒤늦게라도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면, 사람은 누구나 그 일을 마음속에서 정리하고 돌아설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해 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사건의 크기에 비해 겨자씨처럼 작고, 밀가루 서말 속의 누룩처럼 보잘것없어 보여도, 그 작은 행위에는 큰 나무로 자라게 하고, 많은 반죽을 부풀리는 힘이 있습니다.
남의 잘못은 바늘만큼 작아도 몽둥이처럼 크게 부풀리고, 작은 가시가 내 손을 찌를 때는 난리를 피우다가도, 남은 팔 하나가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무감각해지는 오늘의 세태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작가 한강에게 주어진 노벨문학상은 이런 우리의 무감각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그것이 제주, 광주뿐 아니라, 이태원으로, 그리고 남북으로 갈라져 일촉즉발의 위험 상황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우리나라 전체로 번져 나가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대결하고 있는 곳,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상대방을 죽이고 있는 현장, 그리고 66년 전 영국에서 독립한 이래 계속되다가 최근에 격화하고 있는 미얀마의 내전에 이르기까지,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의 무감각을 일깨우고, 화해와 평화의 물결을 이루어, 온 세상에 널리 퍼져 나가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거대한 일은 아주 작은 데에서 시작됩니다. 너와 나, 우리가 한 몸이라는 말은 남편과 아내에게 제일 먼저 해당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즐겨 쓰시는 비유대로, 우리 몸에는 수많은 지체가 있고, 그중 하나가 아프면 온몸이 아픈 것과 같이, 인류라는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병든 인간성을 고치는 의사로 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치유해 주시라고, 그렇게 해서 우리 하나하나가 겨자씨가 되고, 누룩이 되게 해 주시라고 기도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불평을 하거나 다투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여러분은 나무랄 데 없는 순결한 사람이 되어, 이 악하고 비뚤어진 세상에서 하느님의 흠없는 자녀가 되어 하늘을 비추는 별들처럼 빛을 내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꼭 붙드십시오. 그래야 내가 달음질치며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아 그리스도의 날에 자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필립 2,14-16)
이병호 주교(빈첸시오)
전 전주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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