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지난 19일 ‘9.19 공동선언 6주년 기념식’ 기조연설에서 ‘두 국가론’을 주장했다. 한반도에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통일 논의를 접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며, 헌법 3조의 영토조항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부 정리를 제안했다. 임 전 실장의 이러한 주장은 그간 진보 진영 일각에서 제기해 왔던 것인데, 현역 정치인의 발언으로는 처음이다. 전쟁의 문턱을 넘나드는 위태로운 상황에서 평화 정착에 전념하자는 충정은 이해되지만, 남북 간 적대와 갈등 그리고 남한 내 이념 갈등의 원인 진단과 처방이 잘못되었기에 본인 의도와 정반대되는 결과만 낳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통일 논의 때문에 국민적 합의가 안 된다는 인식

임 전 실장은 “통일이 전제되어 있음으로 인해 적극적인 평화 조치와 화해·협력에 대한 거부감이 일고 소모적인 이념 논란이 지속된다는 인식 때문”에 ‘두 국가론’을 제안했다고 한다. 올바른 현실 인식일까? 통일 논의를 안 하면 평화 조치와 화해·협력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질까? 그렇다면 ‘선(先)건설 후(後)통일’론으로 통일 논의를 엄격히 금지하고 통일 운동을 혹독하게 탄압했던 박정희 정부에서는 왜 남북 간 적대와 군사 갈등이 극심했을까?

남북 간 갈등과 적대는 통일 논의 때문이 아니라 분단 그 자체 때문이다. 한 민족이 쪼개져 두 개 국가로 나뉘면 체제 경쟁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필연으로 갈등과 적대가 생긴다. ‘1민족 1국가’로 가려는 구심력 때문이다. 김구 선생이 분단을 막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것도 분단이 전쟁으로 이어지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분단 상태에서는 상대방 국가의 존재 자체가 위협인 것이다. “그냥 따로 함께 살면서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돕고 같이 행복하면 좋지 않을까요”라는 ‘두 국가론’은 냉혹한 분단 상태에서는 현실화될 수 없는 천진난만한 유토피아다.

한반도에서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가 오래 지속되며 ‘분단체제’가 형성되었다. 분단체제는 남북한의 ‘적대적 공생 관계’를 특징으로 하는데, 이는 남북의 지배 세력이 상대와 적대 상태를 활용해 자신의 기득권 체제를 고착시키는 것을 말한다. 1972년 안보 위협과 통일 대비를 명분으로 자행된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1997년 대통령선거 국면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측이 북한 위협을 인위적으로 공작한 ‘총풍 사건’이 생생한 실례다. <조선일보>와 국민의힘 등 남한 내 분단 세력들은 남북 간 갈등이 일어날 경우 이를 증폭시키고, 남북 관계가 호전될 경우에는 궤변과 억지로 이를 가로막곤 했다.

남북 관계에서 현실적으로 당장 실천이 불가능한 일을 앞질러 주장함으로써 북한을 탓하고 실현이 가능한 일조차 가로막았다. 남북 간 교류협력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이념 갈등이 일었던 것은 “통일이 전제”되어서가 아니라 분단체제하 분단 세력 때문인 것이다. 통일을 포기하고 헌법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 통일부 정리를 하자는 주장은 평화에 대한 국민적 합의 도출은커녕 이념 갈등만 불러올 게 뻔하다. 임 전 실장의 제안 이후 보수언론과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경쟁적으로 종북 공세를 펼치는 현상이 이를 입증한다.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남북 간 교류·협력을 지속하고 남남 갈등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독일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국력 우세로 통일을 주도했던 서독 정부의 일관된 통일정책 추진이 가능했던 것은 1982년 사민당에서 기민당으로 정권 교체 후 헬무트 콜 총리가 전임 정부의 정책을 계승했기 때문이었다. 그 배경에는 기민당의 1972년 총선 참패가 작용하였다. 동독과 교류·협력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동서독 기본 조약’ 조인과 브란트 정부의 동방 정책을 둘러싼 공방으로 치러진 총선거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기민당 참패로 막을 내렸다. 전후 처음으로 보수 계열의 기민당·기사연이 진보 계열의 사민당에게 의석수에서 8석이나 뒤지고 자민당까지 합치면 50석이나 모자라는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 선거는 투표율이 91.1퍼센트에 이르러 역대 독일 선거 중 최고를 기록했다. 기민당은 선거 참패 후 라이너 바르첼 당수 등 모든 지도부가 사퇴하고, 당권을 40대 초반의 헬무트 콜에게 넘겨주었다. 당수가 된 콜은 10년의 절치부심 끝에 1982년에야 집권하게 되는데 당을 환골탈태시켰다. 아데나워 초대 총리 이후 기민당의 기본 정책은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콜은 총선 민의를 수용해 정책을 유연하게 끌고 나갔다. 집권 후 전임 정부의 동방 정책을 폐기하고 동독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라는 당내 강경파들의 압박을 물리치고 동독과 교류·협력 정책을 지속시켰던 것도 72년 총선에서의 쓰라린 교훈 때문이었다. 이처럼 서독 내 ‘서서 갈등’은 정면 돌파를 통해서 해결되었던 것이다.

객관적 현실과 과제는 무엇일까?

임 전 실장은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두 개의 국가를 수용”하자면서 변화된 ‘객관적 현실’로 북한의 대남 정책 변화와 연방제 통일론 폐기, 두 국가론을 들고 있다. 올바른 현실 인식일까? 물론 남북 당국의 정책 변화도 중요한 객관적 현실이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남북 간 국력 변화다. 통일은 당국끼리 통일 논의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안 한다고 안 오는 것도 아니다. 통일은 통일 구심력(求心力)이 원심력(遠心力)보다 커질 때 온다. 또 통일 과정은 처음 시작이 어렵지 일단 발동이 걸리면 계곡의 급류처럼 순식간에 진행된다. 역사적으로 통일 과정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걸린 기간은 독일 1년 반, 예멘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통일은 인간 힘으로 그 방향과 과정을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역동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사례를 살펴볼 때 통일 동력이 작동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두 국가 사이 국력 균형이 깨지고, 통일의 구심력이 원심력보다 커야 한다는 조건이다. 인구·경제력·군사력·정치적 정통성 등으로 구성되는 국력에서 남북한은 1970년대 중반을 계기로 역전돼, 1980년대 말에 이르면 남한이 북한보다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다. 2022년 기준 남한은 북한에 비해 인구 2배, 경제력 59.7배에 이른다. 군사력에서도 남한의 국방비는 54.6조 원으로 북한의 국민총소득 36.7조 원을 능가한다. 북한이 재래식 군사력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핵무기·미사일 개발에 성공해 억지력 측면에서 남북이 ‘비대칭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받지만, 전쟁은 종합 국력으로 치르는 것이다. 정치적 정통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남북 간 국력 균형이 깨져야 한다는 첫 번째 필요조건이 충족된 것이다. 문제는 통일의 구심력이 원심력보다 커야 한다는 두 번째 조건인데, 이는 현재 충족되지 않은 상태다. 구심력의 핵심 요소인 민족공동체 의식과 통일 시 발생할 물질적 이득이 남북 간 오랜 단절로 인해 미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노력은 구심력을 강화하는 데로 모아져야 한다. 민족 화해와 교류로 민족공동체 의식을 높이고, 경제 협력으로 상호 의존도를 높여야 한다.

임 전 실장을 비롯한 평화 세력들은 분단 상태에서 평화 정착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평화와 통일은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고 보완하는 관계다. 따라서 평화를 위해 통일을 포기하자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 평화를 위해서는 남북 간 또 남남 간 민족 화해와 적대감 해소, 이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평화협정 · 북미관계 정상화 등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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