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 좋은 걸까. 홍콩으로 향하는 게이트 중간 계단 참에 매우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공간을 찾아내었다. 지금은 토요일 늦은 밤이다. 이제 비행 시간을 따라, 열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나의 마지막 종착지인 사이공은 월요일 아침이 될 것이다.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지만, 공항이란 빈 공간은 시간도 구체적인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이 시간은 이미 내가 살고 있는 집을 떠나, 새로운 마음으로 내가 만날 사람들, 수업에서 만날 학생들과 만들어 갈, 아직 시작되지 않은 그 시간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늦은 밤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이 시간은, 특정하여 베트남 시간도 홍콩 시간도 아닌 이 시간은, 그저 아시아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초입일 뿐이다. 그래서 난 이런 시간을 사랑한다. 토머스 머튼이 말하는 새로움이 시작되려 하는 버진 포인트(the virgin point)이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이 되면,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각자의 행선지를 향해 떠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 하면서, 이 텅 빈 시간을 즐긴다. 

짐을 싸고, 한 달여를 비워 두어야 하는 집을 건사하기 위해 하루 종일 분주했던 터여서, 공항에 도착하고 나서야, 다시 한번 여름을 향해 떠나는 이 여행 일정으로 인해 나의 주일이 사라졌음을 알았다. 하는 수 없이, 이렇게 홀로 나만의 공간을 만날 수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오늘 쿠키를 구워 가지고 나를 찾아온 우리 동네 사는 친구 아나가, “너는 많은 사례비를 받지도 못하는 , 그곳에 가는 데 왜 진심인지 모르겠다”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베트남이 뭐가 좋으냐고. 아까 낮엔, 그냥 나도 모르겠다라고 답했는데, 이제 나에게 조용히 물어본다. 너는 베트남의 무얼 좋아하냐고. 베트남 국수, 그곳에서 들리는 새벽 기도 소리, 시장의 번잡함, 시적인 골목길, 그런 것도 좋지만, 그곳이 어느 곳이든 나를 초대하는 곳이니 좋은 거라고, 내게 답해 준다. 내게 없는 것을 줄 수는 없으니, 내 안에 제법 넉넉히 있어, 비교적 쉽게 나를 내어 줄 수 있는 것, 즉 학생들의 마음과 생각에 화들짝 놀라며, 그들이 사랑하는 예수 그분을 함께 경배하는 마음을, 줄 수 있으니 가는 거라고.

사이공 시내 한복판에 있는 대성전. 그곳에 가면 열심한 신자들이 있고, 순교자들의 동상이 있고, 옆에는 책방 거리가 있다. 무언가 간절한 느낌이 있어서, 나는 이 성당을 좋아한다. ⓒ박정은
사이공 시내 한복판에 있는 대성전. 그곳에 가면 열심한 신자들이 있고, 순교자들의 동상이 있고, 옆에는 책방 거리가 있다. 무언가 간절한 느낌이 있어서, 나는 이 성당을 좋아한다. ⓒ박정은

젊을 때는, 공항에 들어서면 무언가 설레는 느낌이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한 구석 서늘해진다. 어딘가 낯선 곳을 향해 떠나는 마음이 즐겁기만 할 수는 없다. 나이가 들면서, 이것저것 챙길 것도 많아져서, 소화제도 챙기고, 영양제도 챙긴다. 그러나 결국 미션의 핵심은 내가 기꺼이 손님이 되는 일일 것이다. 그곳에서 나에게 건네는 환대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으레 가는 곳이 된 베트남을 향해 가면서, 내가 새롭게 보고 배울 삶의 모습들을 제대로 잘 볼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한다. 혹시 내가 가진 편견이나 선입관으로 그들의 삶을 함부로 생각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오늘 아침에 묵상했던 구절이 마음에 깊이 꽂힌다.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교회 신자들에게 자신들은 누구를 더 좋아하거나, 누구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라고 지목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1코린 4,6) 모든 학생을 똑같이 사랑하리라는 결심을 해 본다.

또 가르치면서 학생들의 신앙 안에서, 그리고 성소 안에서 힘을 가지게 하기 위해, 유약해지고 떨리는 마음을 유지하기로 한다. 내가 좋아하는 벨 후크는 교육자는 수업에서 약해져야(Vulnerable) 한다고 했는데, 내가 만나는 젊은 그리스도인이 가진 신앙의 빛이 더 건강하게 동트기를 기도하며, 나는 나의 실수와 실패를 기꺼이 나눌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고유한 목소리로 하느님 안에서 빛나기를 고대하면서 수업을 진행할 것이다. 

젊은 베트남 수녀님들이 기도하는 소리, 웃는 소리, 그런 소리 안에서, 사랑을 읽는다. 하늘나라를 위한 야심을 내려놓고, 그저 매 순간 하늘나라를 만나고 싶다. ⓒ박정은
젊은 베트남 수녀님들이 기도하는 소리, 웃는 소리, 그런 소리 안에서, 사랑을 읽는다. 하늘나라를 위한 야심을 내려놓고, 그저 매 순간 하늘나라를 만나고 싶다. ⓒ박정은

어제 줌으로 한 여성 영성 수업에서 나는 내가 만나는 여성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서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 혹은 그 작품 속의 캐릭터나 음악들을 나누기로 했다. 이 아름다운 여성들은 많은 이야기를 짧은 시간에 나누어 주었는데, '빨강머리 앤'도 여러 번 등장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등장했으며, 심지어는 게임도 등장했다. 나는 여전히 '바베트의 만찬'을 좋아하는데, 빵을 나누고 함께하는 일에 참 진심인 나를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수업을 함께한 자매들은 하나같이 자기의 목소리를 찾는 일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이야기했다. 자기들의 진심을 말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대학에서 가르칠 때도, 가끔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가 지금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 하고 이야기하곤 했었다. 무언가 골몰하는 얼굴, 그리고 자신의 세상과 맞지 않은 새 세계를 이해하느라고 찡그린 사람들의 얼굴은 정말 아름답다. 그리고 그렇게 삶의 지평이 또 확장되는 신앙을 가지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목도할 수 있는 나의 자리를 사랑한다.

그러면서 또 홍콩에서 만날 자매들의 얼굴도 상상해 본다. 하루에 9시간씩의 성서 수업을 마다 않은 홍콩의 가톨릭 평신도 여성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울컥해진다. 물론 힘은 들겠지만, 말씀이란 식탁을 차려 놓고, 함께 먹고 마시며, 신앙을 살아가는 아름다운 일들을 서로 나누리란 생각에 마음이 조금씩 설렌다. 조금은 지친 상태로 집을 나섰던 이 여행에, 내 맘을 준비시켜 주시려고, 나를 이 거의 기적 같은 빈 공간에 데려다 주신 걸까? 이제 비행기를 탈 시간이다. 이 순간, 난 기쁘고 가난한 여행자가 되어 기도한다. 길의 인도자이신 성모님께서, 매 순간 나와 함께해 주시길. 

내가 머무는 베트남 신학교 옆 본당(성당)에서 기도하는 소리는 이른 새벽에 시작된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베트남은 새벽을 여는 기도 소리다. 기도 소리에 깨서 미사를 드리고, 함께 공부하는 이 시간은&nbsp; 수도자의 리듬과 질서를 회복하는 시간. ⓒ박정은<br>
내가 머무는 베트남 신학교 옆 본당(성당)에서 기도하는 소리는 이른 새벽에 시작된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베트남은 새벽을 여는 기도 소리다. 기도 소리에 깨서 미사를 드리고, 함께 공부하는 이 시간은  수도자의 리듬과 질서를 회복하는 시간. ⓒ박정은

박정은 수녀
홀리네임즈 대학 명예교수. 글로벌 교육가/학습자.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상처받은 인간다움에게: 나, 너 그리고 우리의 인문학"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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