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서 양치질하고 씻고 물 한 잔 마시고 출근을 준비한다. 출근 시간 지하철에서 읽을 책이나 듣고 싶은 오디오북 등을 떠올리며 역으로 걸어간다. 역까지 걸어가면서 예수 기도를 바칠 때가 있다. 신심의 발로라기보다는 그냥 삶이 허하고 힘들게 느껴질 때 달리 해 볼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길에서 만나는 취객이나 앉아서 흐느껴 우는 여인이나 청소부를 만나면 화살기도를 드리곤 한다. 그들에게서 부정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니 나를 위한 기도이기도 하다. 매일 맞이하는 동트는 새벽이 희망찬 새날로 인식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보통 출근 시간은 무엇인가 허전하고 피곤하다.

지하철에서는 오디오북을 듣거나 오늘의 복음을 듣거나 인터넷을 유랑한다. 요즘에는 특히 정치 관련 뉴스를 보면서 자주 분개한다. 돌이켜 보면 요즘만 분개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새삼스레 의식한다. 사실 오래전부터 줄곧 분개하며 살았다. 물론 사이사이에 개인적으로나 정치 사회적으로 영광의 순간들도 있었다. 영광은 짧았고 고통과 분노는 길었다. 분노는 내면의 평화에 불을 지른다. 나는 자주 분개한다. 그리고 분개는 어떤 종류든 나의 인격이 향상되는 길을 방해한다. 그러면서 또 나는 분개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평정과 분개 사이를 오간다. 분개는 때로 비판적 글을 쓰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신학이나 영성을 공부하는 데 비판적 접근을 결코 포기해서도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비판이 내 신학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비판만 하면서 삶을 보내고 싶지는 않은 까닭이다. 비판 이후에는 씁쓸함이 남을 때가 많다.

출근해서 차를 마시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잠깐 숨을 고른 다음 일을 시작한다. 물론 여덟 시간 내내 몰입해서 일하지는 못한다. 월도(월급도둑), 혹은 월급루팡이라 부르는 소심한 저항도 심심찮게 한다. 50 넘겨 뒤늦게 시작한 직장생활도 어느덧 물러가야 할 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개인사에서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안정된 기간이었으나 직장에서 펼치려던 어떤 기획과 포부는 몇 가지 이유로 많이 꺾였다. 직장에서 ‘동지’를 찾는 것은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딘가 한 사람 정도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기는 했었다. 어딘가 예수의 제자가 한 사람 정도는 있지 않을까, 예수의 복음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삶의 척도로 삼은 사람이 적어도 하나는 있지 않을까, 어딘가에 신앙인이 한 명 정도는 있지 않을까, 어딘가에 신학자 한 사람은 있지 않을까 하는. 이제 더는 밖을 향해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는다. 나에게만 유효한 질문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이 되면 다시 지하철로 간다. 지하철과 길에서 대략 한 시간 반 정도를 보내면 집에 도착한다. 퇴근길 지하철에서는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일쑤다. 그러다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기도 한다. 출퇴근에만 매일 세 시간을 길에서 보내는 셈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든 보람 있게 지내려고 해 보았는데 이 역시 만만치 않았다. 소위 ‘보람’이라는 것은 내가 원한다고 맘대로 가져올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지 출처 = Pixabay)
(이미지 출처 = Pixabay)

집에 도착하면 피곤하고 기운이 빠져서 어떤 일을 따로 하기도 마뜩잖다. 때로는 씻는 일조차 귀찮게 여겨진다. 책을 읽는 일도 집중력이 떨어져 건성건성 한다. 읽어야 하거나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의무적으로 방어한다. 이마저도 종종 마감을 넘기곤 한다. 저녁을 대충 먹고 막걸리 한잔 걸치면 금방 침대에 들 시간이 온다. 예수께서는 깨어 있으라고 하셨지만, 모든 것을 잊고 나도 모르게 쉴 수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잠자리에 들면서 다음 날 눈이 뜨이지 않기를 바랐던 고통스러웠던 밤들도 잠이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잠을 자듯이 눈감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인가. 월간 하루의 평균 수면 시간을 보니 네 시간 반 정도 나온다. 지하철에서 졸 때도 있고 낮잠을 잘 때도 있으니 하루 5시간 정도는 망아(忘我)의 경지에서 지낸다고 볼 수 있다. 신비주의의 핵심에 있는 것이 망아가 아니던가.

지난 세기의 뛰어난 신학자 카를 라너는 "일상"이라는 작은 책에서 “일상을 축일로 바꿔 놓을 수 없고 바꿔 놓아서도 안 된다”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일상은 꿀도 타지 않고 미화하지도 않은 채 견디어 내야 한다”고 하나 마나 한 주장을 하고 있다. 일상은 무엇이고 축일은 무엇인가. 일상에 탈 꿀이나 미화할 무엇 없이 오늘을 오는 대로 버터야 하고 기약 없이 내일을 맞아야 하는 게 보통 우리네 삶이 아니던가. 따로 깊게 성찰하지 않더라도 나의 일상은 충분히 비참하며 충분히 축일이다. 일상 속에 축일이 있고 축일 속에 일상이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해하지 않기를. 일상의 신학을 간결하고 농도 깊게 보여 주는 라너의 책은 읽을 만한 멋진 책이다.)

종종 비루하다고 느껴지는 나의 일상은 고단함과 지루함과 무의미를 넘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목마르게 아우성치고 있다. 그런데 일상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의 은총은 일상에서 어떻게 작동되고 어떻게 감지되는가?

그러나 한 걸음 물러서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구원을 몸으로 느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꼭 체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은 나의 깨달음이나 인식 이전에도 함께 계시면서 초월하는 분이실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우리의 사랑과 죽음과 고통과 분개와 연민 없이 구원을 말할 수 없기에, “세상 밖에 구원이 없다”는 격언은 우리에게 말을 건넬 수 있다. 세상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은 일상 밖에 구원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위대한 신비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14세기 플랑드르의 사제 얀 반 뤼스브룩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삶’의 견지에서 신비주의적 관상 생활을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영적으로 고양된’ 사람, 영적으로 어떤 경지에 이른 사람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고양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삶’을 나누고자 한다. 그에게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삶’이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이었다. 뤼스브룩이 명시적으로 분명히 했던 것이 있다. 평온한 관상적 경지를 근본적인 목표로 삼고서 자선이나 윤리의 요구를 무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모든 이 중에서 영적으로 가장 사악한 죄인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고 도를 닦는다는 미명하에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너무도 뻔한, 전혀 새로울 것 없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때로는 오래 묵은 것이 아주 새롭게 다가올 수 있다. 어떻든 나의 평범하고 고루한 일상 안에 엄청난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조언은 또한 하나의 복음이며 탐색해야 할 무엇이 아니겠는가.

강창헌

신앙인아카데미에서 10여 년간 일했고, 지금은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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