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에서 국민의 민심이 폭발했다. 민심이 던진 메시지는 많지만, 그중 ‘보수결집 필승론’의 소멸은 정치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보수 세력이 결집하면 선거에서 무조건 이긴다는 보수 엘리트들의 믿음을 확실하게 깨버렸다. 보수·진보와 영남·호남 출신자들이 고루 섞여 사는 수도권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했을 뿐 아니라, 전통적으로 보수세가 강한 충북 등 충청권에서도 완패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보수결집 필승론’이 소멸한 것이다.
‘보수결집 필승론’의 뿌리
보수결집 필승론은 선거 공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매우 튼튼한 뿌리를 갖고 있다. 우선 지역 기반에서 보수 정당은 우세한 입장에 있다. 보수의 본거지라 불리는 대구·경북의 국회 의석수는 25석으로 광주·전남·전북의 28석과 엇비슷하다. 여기에 부산·울산·경남의 40석까지 합치면 경상도 의석수는 전라도의 2.3배에 이른다. 이 같은 지역 기반에 보수 표심이 강한 충청·강원의 의석을 더하고 수도권에서 웬만큼만 선전하면 보수당은 항상 과반 이상을 확보할 수 있다.
유권자 성향 면에서도 보수 정당이 유리하다. 국민들이 총동원되는 역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분석해 보면 이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직선으로 치른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힘 계통의 보수 정당은 노태우 32퍼센트(1987년), 김영삼 33.9퍼센트(1992년), 이회창 30.8퍼센트(1997년)와 32.7퍼센트(2002년), 이명박 30.5퍼센트(2007년), 박근혜 38.9퍼센트(2012년), 홍준표 18.5퍼센트(2017년), 윤석열 37.1퍼센트(2022년) 등 탄핵 직후 예외적 선거였던 2017년을 제외하곤 항상 30.5-38.9퍼센트의 안정적 득표를 했다. 위 득표율은 투표자 대비가 아닌 전체 유권자 대비 득표율로서 기권표까지 고려한 숫자다. 정치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기권율도 유권자들의 의사 표시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통상 선거에서 기권율이 30퍼센트 이상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30퍼센트 이상 고정 지지층을 지닌 보수 정당은 선거에서 지기 어렵다. 더욱이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이 위협받는 상황이 일어날 때 적극 투표에 참여한다. 이에 비해 민주당 득표율은 16.4-36.5퍼센트로 정치 상황에 따라 편차가 크다. 2007년 대통령 선거처럼 명분이 약하고 승리 가능성도 낮은 상황에서 지지층 상당수가 기권함으로써 정동영 득표율은 16.4퍼센트에 그쳤다.
보수 우위의 유권자 지형은 한국 현대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해방 직후만 해도 1945년 12월 미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사회주의 70퍼센트, 공산주의 10퍼센트, 자본주의 13퍼센트로서 한국민들의 여론 지형은 진보 우위였다. 일제의 군국주의가 자본주의에 기반한 것이고, 또 일제 강점기 반일 노동·농민운동을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그러나 여론 지형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사항을 둘러싼 탁치 대쟁을 거치며 보수 우위로 변화하였다. 또한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을 거치며 좌익 세력이 숙청되고, 1949년 국가보안법 제정과 보도연맹 결성으로 대한민국은 친미·반공의 나라가 되었다. 더욱이 6.25 전쟁과 1960년 5.16 쿠데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사회 정화까지 겹치며 진보는 좌경·용공 세력으로 몰려 싹까지 다 잘리었다.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진보를 표방하는 세력은 국회 등 제도권에 발도 붙일 수 없었다.
보수 엘리트의 선거 전략
보수 우위의 유권자 지형에서 보수 정당은 편한 선거 캠페인을 펼칠 수 있었다. 호남 고립을 목표로 한 지역감정 유발, 색깔론 등으로 보수 표심을 자극해 세력을 결집시키면 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이른바 ‘보수결집 필승론’의 불패 시대가 지속했다. 이번 4.10 총선에서도 국민의힘은 ‘이·조 심판’ 등 네거티브 캠페인으로 일관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는 반국가세력이 활개를 치고 있다”(2023년 광복절 축사)며 수시로 이념 공세와 색깔론을 제기했다. 민주당 등 야당에 공산 전체주의 이념을 가진 세력이 있고,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라는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협치 대상이 아니라며 야당과의 협치를 주문하는 국민여론을 단호하게 물리쳤다. 보수 결집만 하면 이기는 선거에서 굳이 국민 여론과 유권자들의 요구에 반응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 보수 엘리트들은 시대 변화에 둔감하다. 미국의 리더십이 약화하고 있는 국제질서 변화에도 불구하고 친미·반공 외에 다른 사고를 하지 못한다. 자립·자강의 의지도 없다. 홍준표 대구시장의 지적처럼 국민의힘은 “용산만 목매어 바라보는 해바라기 정당”이 되어, “당 안에서 인물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당 밖에서 셀럽을 찾아 자신들을 위탁하는 비겁함으로 명줄을 이어 가고” 있다. 미국이 가져가라는 전시작전권도 한사코 거부하고 있다. 군사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고 있지만 실상 몸에 밴 대외 의존적 사고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 균형 외교를 해야 할 객관적 상황임에도 이들은 미국 정책에 배치되는 어떤 정책도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이들의 사고 구조는 “큰 나라, 앞선 나라를 섬기거나 우러러보고 그 힘을 추종하며 자기 것을 업신여기는 마음 상태”인 사대주의의 전형이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홀로 서서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DNA가 없다.
새는 좌우 날개로 난다
‘보수결집 필승론’의 소멸로 한국 정치는 발전의 계기를 맞았다. 또한 국민의힘도 보수 정당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이제 국민의힘은 권력자만 쳐다보는 정당이 아니라 국민의 여망에 부응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정당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상 변화를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닌,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먼저 미국의 리더십 약화로 일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바뀌고 있는 국제질서 변화를 직시해 외교안보 정책 기조를 바꿔야 한다. 이번 미일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미일 중심의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한국이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로 전락할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북한과의 적대·긴장 격화와 한미일 대 북중러 진영 대결이 북핵 문제 해결, 안보 불안 해소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새는 한쪽 날개로만 날 수 없다.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 · 번영 · 통일로 가는 데 보수의 역할이 중요하다.

백장현
정치학 박사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운영연구위원장
저서 "통일코리아 가는길", "북핵해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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