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었는데 분쟁의 끝은 여전히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비판적으로 이 사태에 주목해 온 이들이 처음부터 지적했듯이 러시아와 북대서양조약기구(이하 NATO) 사이에 직접적인 군사 대결로 진전될 우려가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지금까지 발생한 인명과 환경 피해는 그야말로 충격적이다. 양측에서 군인 수십만 명과 민간인 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거나 심각한 신체, 정신적 장애를 입었다. 총인구 3100만 명 가운데 약 3분의 1에 달하는 우크라이나인이 자국 내에서 난민이 되거나 자국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생태계의 상당 부분이 황폐화되었고 국가 재정은 유럽연합(EU)과 미국으로부터의 막대한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도 적대 행위의 즉각 종식을 추진하고 외교 채널을 통해 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유럽 국가들은 ‘NATO 회원국들로부터 계속 무기 공급을 늘려야만 군사적 승리가 가능하다’고 우크라이나 정부를 부추기고 있다. 이제는 NATO군 파병까지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실정이다.
러시아 침공이 시작된 직후 평화로운 해결책을 실현할 중요한 기회가 있었다는 사실은 유감스럽게도 잊히고 세계인의 머리에 각인되지도 않았다. 2022년 3월, 튀르키예 대통령 에르도안,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나프탈리 베네트, 독일 전 수상 게르하르트 슈뢰더 중재하에 이스탄불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대표 간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이른바 ‘이스탄불 코뮤니케(이스탄불 합의서)’가 그달 29일 발표되었다. 이 문서에서 두 분쟁 당사자는 다음 사항에 합의했다.
- 우크라이나는 핀란드의 예를 따라 중립국임을 선언하고 NATO 또는 기타 군사 동맹에 가입하지 않으며 외국 군사기지나 군대를 우크라이나 영토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돈바스가 이탈리아에서 남티롤(쥐트티롤, 알토 아디제)의 경우처럼 광범위한 자치권을 얻는다는 조건으로 크림반도를 제외한 모든 우크라이나 점령 지역에서 철수한다.
- 우크라이나의 영토 종주권은 중국, 러시아, 미국 및 유럽 국가들을 포함하는 이른바 보증 국가들에 의해 보장된다.
그러나 애쓴 보람도 없이 평화협정 체결이 마지막 순간에 무산됐다. 그에 앞선 3월 24일 NATO 특별정상회담에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평화 협상을 지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이후 4월 9일 당시 영국 총리였던 보리스 존슨은 예고 없이 키이우에 나타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서방세계가 휴전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선언했다. NATO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에 이익이 될 조기 평화협정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른 재앙을 초래한 데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2023년 말에서 2024년 초까지 미국 정부에 휴전 회담을 여러 차례 제의했지만 거부당했다. 서방 국가들과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러시아와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이들은 러시아가 “지배 영역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려는 제국주의 국가”라는 새롭고 수상쩍은 내러티브를 구사했다. 우크라이나는 첫 번째 희생자일 뿐이고 우크라이나에서 이 러시아 제국주의를 중단시키지 못하면 러시아는 다른 유럽 국가를 차례차례 침공할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이런 주장을 “터무니없는 소리”라 일축했다. 그러나 유럽 국가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크라이나를 계속 지원해야 한다는 필연성뿐 아니라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에 대비하기 위해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해야 할 필요까지 주장하고 있다.
3월 중순, 샤를 미셸 유럽평의회 의장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새로운 구호를 내걸었다. 이에 앞서 에스토니아의 카야 칼라스 총리는 방위비 지출 증액을 유럽 국가들과 NATO에 촉구했다. 폴란드의 도날트 투스크 총리는 현재 유럽이 1939년 2차 대전 발발 당시에 비할 만큼 ‘전쟁을 목전에 둔 시기’라 말했다.
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예를 들어 칼라스 총리는 “폭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평화주의는 자살 행위”라 주장하면서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이들을 모욕했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의 한 칼럼니스트도 평화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룸펜 평화주의자”라고 모욕했다.
독일의 한 고위 장성은 5년 후에는 독일이 “전쟁에 나설 능력이 있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일군의 대규모 재무장뿐 아니라 독일 사회의 이념적 무장, 즉 평화 교육이 아닌 전쟁 교육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이다. “학교의 임무는 젊은이를 전쟁에 대비시키는 것”이라는 발언으로 독일 교육부 장관은 곧장 그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이를 위해 학교에서 민방위 훈련을 실시하고, 독일연방군 장교들은 학생 대상으로 군복무를 장려하는 강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보건부 장관은 군사 충돌에 대비한 의료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제 새로운 슬로건은 영국 작가 조지 오웰(1903-50)이 "1984"에서 말했듯 “전쟁으로 평화를!” 또는 “전쟁은 평화다!”가 되고 말았다. 이 소설에서 독재국가 오세아니아는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1984"에서 전쟁은 이기려고 하는 행위가 아니라 강대국 간 힘의 균형과 현상 유지를 위한 수단이다. 전쟁이 너무 과열되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지속되면 백성들은 전쟁에 바빠 사회 개혁이나 체제 변혁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최근에 이 새롭고 대단히 공격적인 유럽의 호전주의에 직면했다. 스위스 텔레비전 <RSI>와의 인터뷰에서 진행자는 교황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우크라이나에는 백기를 들고 항복할 용기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는 힘 있는 자들을 정당화해 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교황은 이렇게 답했다. “그것도 한 가지 해석이겠죠. 하지만 더 강한 쪽은.... 국민을 생각해서 백기를 흔들고 협상할 용기가 있는 쪽일 겁니다. 협상은 결코 항복이 아닙니다. 조국을 자멸로 이끌지 않는 용기죠.” 이 발언으로 교황은 사방에서 신랄한 공격을 받았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침략자들에게 항복하도록 부추기고 있으니 '푸틴 편'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독일의 저명한 가톨릭 정치인들은 “교황이 부끄럽다”고도 했다.
‘무의미한 대규모 인명 살상과 죽음, 전쟁의 파괴적 광기를 멈추고 평화 협상의 길로 나아가는 일’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그의 적대자들과 비판자들은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독일 언론과 정계에서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의 한 유력 정치인이 “일단 휴전했다가 결국 종전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이젠 유럽에서도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가 사방에서 분노의 폭풍에 직면했다. 평화를 위한 숙고와 노력이 논의에서 철저히 배제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은 있다. 글로벌 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EU 회원국 국민 가운데 "전쟁이 나면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다.
게르만 호흐(Germann Hoch)
독일 프라이부르크 출생.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라틴어 및 그리스어,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과 독문학을 복수전공했다. 기쎈 대학에서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Deutsch als Fremdsprache)'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프랑크푸르트 대학 강사로 재직했다. 한국에 와서 한양대학교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일하고 정년퇴임한 뒤, 번역과 독일어 교육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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