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있는 분들의 착한 소비를 기다립니다. 평창 고랭지 무농약 양상추 1박스(약 8킬로그램) 만 원입니다. 직접 배송해 드립니다.”
얼마 전 일이다. 강원도 가톨릭농민회 회원이 갑자기 판로가 막혀 양상추를 팔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8킬로그램이 양상추 몇 개인지 물어보니 크고 작은 것이 섞여 20통 정도라고 했다. 동네 마트에서 양상추 한 통은 2000원이 넘고, 비싸게는 2통 묶음이 약 7000원이다. 아무리 직거래라고 해도, 20통에 1만 원이라니.
다행히 “뜻있는” 이들이 움직여 주문을 받고, 배송을 맡았다. 친구는 인맥을 총동원해 10박스 주문을 받아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물량을 다 소비했겠나 싶었다.
그야말로 피땀 흘리며 농민의 사명을 다하려는 이들이 매 순간 부닥치는 현실은 너무 고되고도 가혹하다. 출하가 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그렇다. 농촌, 농민의 현실은 수치가 정확히 말해 준다.
농업 예산 3퍼센트 미만, 2023년 국가 예산의 2.7퍼센트.
2022년 농가 연평균 농업 소득 948만 원.
농민 1명당 국민 7명 식량 감당.
어쩌려고 이러는가. 식량안보라는 말이 버젓이 존재하는 상황에, 농민의 수익은 삶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고, 정부 예산은 제자리다. 농민의 사명감에 의존한다 해도, 그들의 노령화는 이미 가속화 되는 이 현실을 “수입산으로 충당하면 된다”고 말할 것인가. 우리가 비빌 언덕이 없을 때, 수출하는 나라들이 어떤 횡포를 부릴지 예상하기 어려운가. 무엇을 믿고 식량 자급 문제에 이렇게 안일한가. 이것은 어떤 정권의 문제가 아니다. 근대화 이후 내내 이어온 농업에 대한 가치 절하가 만든 현실이다.
또 농촌에 외국인 노동자가 대거 유입되면서 그들의 인건비가 높아지고 있는 마당에, 농촌에 대한 등한시는 농민의 생존권뿐 아니라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권, 인권과도 연관된다.
농업 문제는 정치 이슈가 아니다. 처절한 누군가의 신념을 보장하는 것이고 너와 나의 생존 문제다. 농업이 존중되고, 농민이 힘을 얻고, 농촌에 청년이 살아갈 용기를 낼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선진국일 테다. 또 나를 먹여 살리는 이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 그들에 배은망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윤리이자 상식이고 정의일 것이다.
농민들이 애써 지은 농산물 출하를 포기하거나, 생산비조차 건지지 못해 내년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을지 근심하는 일, 자신의 신념과 소명 의식을 포기하는 일이 없으려면, 가장 큰 힘은, 사실 소비자들에게 있다. 크고 반듯한 공산품 같은 농산물 대신, 작고 울퉁불퉁해도 자연의 힘을 가진 것을, 비닐에 싸인 농산물보다 흙 묻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사실 그들과 우리 자신의 생명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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