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뭔데
비자림로 확포장 공사가 시작되면서 하루아침에 삼나무 숲이 벌목으로 사라졌다. 동료 시민들에게 그 광경은 단지 어느 특정 공간이 파괴된 사건만이 아닌 재난의 징후로 보였다. 베인 숲으로 달려가 문화제를 열려고 했던 밤에, 해당 도로가 지나가는 인근 송당리 마을회와 개발위원회 남성들이 숲에 왔다. 그리고 덤프트럭으로 시민들을 에워싸고 공회전으로 소음과 매연을 내뿜어 기어이 시민들을 내쫓았다. 강정마을은 해군기지에 반대하는 주민 일부를 향약 개정으로 주민에서 박탈하기도 했다. 월정 해녀들이 그들이 사는 마을의 결정과는 다른 의견을 내면서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입장을 밝히자, 마을회가 해녀들이 불침번을 서며 지켜 오던 그 컨테이너를 치워버렸다.
해녀 투쟁을 이야기하기 위해 반드시 불러올 이름 중 하나는 ‘마을’이다. 그것은 맨 먼저 해녀들이 삶과 생존을 영위하는 공동체의 이름이지만, 그 공동체성 작동은 공평하게 기능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경우 판단의 규범이 되거나 결행을 구속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현재까지도 마을 구조는 가부장적 질서로 구성해 있고, 거기서 여성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계급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수십 년 함께 살아온 이들의 투쟁 근거 공간을 단번에 치워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건은 많은 시민에게 적잖이 큰 충격을 주었다.
한번은 마을회와 개밸위원회 남성 주민이 제주도와 계약한 하수처리장 증설업체와 나타나서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그들이 가고 나서 새로 들인 컨테이너 전기선이 끊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발전기를 얻어다 컨테이너에 다시 불을 밝혔다.
떠오르는 장면이 더 있다. 해녀들 공동물질 작업에 가 보니 어촌계장이라는 젊은 남성이 격앙된 목소리로 해녀들을 향해 동부하수처리장 증설 반대 투쟁과 관련해 소릴 지르고 있었다. 해녀들 대부분은 대답도 하지 않았다. 봄에 있던 해신제(용왕제)에서 있었던 일이다. 해녀들이 공동작업 해서 잡은 해산물을 손질해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벌였다. 그 잔치에 마을회와 개발위원회, 청년회 등이 동부하수처리장 증설 관련 ‘시위 한 번에 500만 원’을 내라며 월정리 주민들에게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걸었고, 현장에서 부딪쳐 온 건설업체 임원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는 해녀들이 내놓는 음식을 먹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해녀들 앞으로 고소장이 날아들었다. 그러니까 해녀들을 고소하고 해녀들이 차려준 밥을 먹고 간 것이다. 당장은 그 건설업체에 화가 났지만, 해녀들이 투쟁을 거두지 않은 상태에서 해녀들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마을 남성들이 해당 업체와 나타난 것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국가 권력을 대행하는 마을 권력
제주도의 동부하수처리장 재증설에 저항하는 월정리 해녀회의 투쟁에서도 ‘마을’ 그리고 ‘공동체’라는 말은 여전히 새로운 질문으로 부각했다. 마을은 ‘리’나 ‘동’ 같은 행정 단위 구획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맥락과 동일 경험에 기반하는 ‘생활공동체’다. 공동체성을 공유한 집단이고 국가로부터 일정 부분 독립적인 단위였다. 향약이 인정되는 것도 오랜 시간 공동체 형편에 따라 조정되어 온 경험과 가치가 법보다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끊임없이 마을을 국가의 하부 조직(식민지)로 구상하고 조직해 왔다. 소위 ‘개발사’ 영역의 구체적 현장이 종국엔 마을공동체 파괴를 종점으로 하는 것은 개발의 주체 권력이 개발 영토 단위를 영위하던 마을과의 관계가 애초에 동등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과정에서 국가주의를 내면화한 마을 역시 내부의 민주주의를 스스로 훼손하면서까지 국가의 개발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스스로를 동원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국가의 척도와 가치가 내면화하며 국가권력을 대행하기도 한다. 새마을운동이나 개발위원회가 존재하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마을은, 독립된 삶 공동체이지만 국가 총동원체제 아래에 놓여 있다. 개발 사업 갈등이 있는 곳이면 항상 그 지역 개발위원회가 등장한다.
개발위원회는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권이 국가 시책을 행정구역 최하단위 ‘리’ 단위까지 일괄적으로 침투시키기 위한 도구로서, 현재 난립하는 각종 개발 사업을 주도할 조직으로 구성되었고, 새마을운동의 말단 추진 기구로 재편되었다.1) KDI보고서에서 개발위원회 설립과 활동에 대해 살펴보면, 개발위원회는 마을 내의 개발 사업에 대한 권한을 갖는 조직이다. 이 개발위원회는 주민 총회에 올릴 안건에 대한 사전 심의 및 조정 역할을 한다. 이와 더불어 마을 안의 이익 집단 및 주민의 개발 의욕을 통합시키고 조정하는 중간집단 기능을 수행한다. 뿐만 아니라, 개발주의 담론을 유포하고 마을의 개발 사업에 대한 결정권을 행사했다. 총동원체제의 말단 조직으로서 마을의 유력자를 포괄하여 마을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좌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는 지역 마을공동체 사회의 저항성을 봉쇄하면서 개발반대 운동으로 드러나는 체제 도전까지 두루 타개할 수 있었다. 월정리 사태를 통해 드러난 마을공동체의 불평등은 마을의 개발 조직들과 개발주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고, 마을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마을 내부의 민주주의와 자치력 문제로 돌아온다.
마을에 저항하기, 마을이 저항하기
그러나 마을은 단순히 국가가 장악하고 통제할 뿐인 단위에 불과한가? 주민들은 권력으로 동원된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이기만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국가의 통치 기획 속으로 포섭된 마을이기도 하지만, 저항과 해방도 거기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월정리 해녀들의 투쟁이 새롭게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나 마을 내부 구성원이 마을에 저항한다는 것은 마을이 국가와 새로운 관계를 맺기 위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렇다면, 월정리 해녀 투쟁을 통해 마을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 냈을까?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갑자기 전격적으로 해녀들과 대화하겠다면서 이틀 시간을 주었다. 면담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월정리 마을회가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해녀회는 이 다급한 경로를 받아들이고 면담에 참여했다. 여러 생각이 들었다. 당장은 마을 권력과 어려운 관계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남편 아들, 아버지가 있는 삶 테두리다. 해녀삼춘들은 바다를 지키고, 마을의 미래를 지키고 싶었던 것이지, 누굴 이기거나 승리하는 것이 자신들이 상대가 생겨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마을공동체라는 지형 자체가 너무도 역동적이다. 그럼에도 월정 해녀들은 그들을 구속하던 어떤 테두리를 거부하고 물음을 밀고 나가는 것으로 지금은 보이지 않는 균열을 만들었다.
1) 정갑진, "1970년대 한국새마을운동의 정책경험과 활용", KDI 보고서, 2009.
엄문희(멸치)
강정평화네트워크 활동가. 2015년 12월부터 강정마을에 살고 있다. 처음엔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1년 살이 계획으로 8살 아이와 왔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월정리 해녀들의 투쟁에 동참하며 이야기를 쓰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