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한 스리랑카 학자 주데 페르난도 교수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와 간담회 열어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신학자이자 평화학자인 주데 페르난도 교수와 간담회를 열었다.

스리랑카 싱할라족 출신인 페르난도 교수는 스리랑카 내전(1983년 7월부터 2009년 5월까지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족 반군 사이에 일어난 내전) 당시 싱할라족과 타밀족 사이의 화해와 반전평화 운동을 하다 정부에 반체제 인사로 낙인 찍혔다.

이 일로 망명자 신분이 된 그는 아일랜드에서 정착했다. 현재 아일랜드 더블린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종교, 신학, 평화학부 교수로 일하고 있고, ‘분쟁 후 정의를 위한 트리니티 센터’ 소장도 맡고 있다.

지난 16일 진행한 간담회에는 강주석 신부(의정부교구 민족화해위원장), 정수용 신부(서울대교구 민족화해부위원장), 백장현 박사(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장), 마리 이삭 수녀(의정부교구 민족화해센터), 이대훈 소장(평화/교육연구소)을 비롯해 교회 내 민족화해위원회와 인권 관련 활동을 하고 있는 청년 10여 명이 함께했다.

이 자리에서 주데 페르난도 교수는 스리랑카 내전으로 겪은 일들, 그리고 ‘정의로운 평화’를 위해 신앙과 행동을 결합하도록 하는 해방신학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

스리랑카(옛 실론)는 1505년부터 약 440년간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스리랑카 국민들은 가톨릭 개종을 강요받았다. 실론 왕국에서 공화정인 스리랑카로 국호가 바뀐 것은 1948년 영연방 자치령으로 독립한 뒤다.

스리랑카의 토착 민족은 싱할라인이었고, 종교는 불교다. 영국 식민 지배 당시 커피 재배 규모가 커지면서 인도에서 이주한 노동자들이 타밀인이었는데, 이들의 종교는 힌두교였다. 종교와 경제 차이로 타밀인들이 독립을 주장한 결과는 결국 내전이었다.

내전 중에는 식민지 시절 가톨릭 개종 영향으로 싱할라 가톨릭인이 다수파였다. 이 다수파가 타밀인에 반대해 정부를 지지했으나 싱할라 가톨릭인 중에서도 다수파를 반대하는 소수파가 있었고, 페르난도 교수도 소수파에 속했다.

페르난도 교수는 “스리랑카 내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의 다수-소수파 분열은 동시에 기회로 작용하기도 했는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유일하게 타밀족과 싱할라족을 동시에 대변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주데 페르난도 교수. (사진 제공 =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주데 페르난도 교수. (사진 제공 =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페르난도 교수가 신학, 평화학으로 나아가게 된 결정적 계기가 또 하나 있다. 내전 직전인 1980년 싱할라인들의 타밀인 여성 성폭행 사건이었다. 그는 당시 정치를 잘 모르던 청년이었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는가”라며, “그것은 내 양심의 소리였다. 나는 아직 그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 사건으로 타밀에 대해 공부하고, 신학, 스리랑카 역사를 연구하며 평화를 향한 여정으로 나아갔다. 성경공부를 하면서 ‘모세의 순간’을 만났으며, 실천이 있었고, 신학은 나중에 따라오게 됐다.

가톨릭 사제였던 그는 타밀인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을 오가며 타밀인들을 만나고 소통했다. 싱할라인이지만 사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점차 가톨릭 평화활동가 그룹을 조직하고, 군사 위기 상황에서도 타밀인들과 만나며 식량, 구호품을 보냈다.

이런 활동으로 타밀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화해를 위한 대화를 요청하며, 비폭력 방법을 통한 화해와 평화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싱할라인들이 왜 인종주의자가 됐는가를 공부하면서, “분열은 제국주의 식민지로 생긴 것”임을 알게 됐다. “영국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은 싱할리인들을 마치 미국이 남한 사람을 대한 것처럼 대했다.”

그는 분단이 만들어 낸 문화는 전형적으로 집단의식을 재생산하도록 하는데,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문화의 수면 밑에 있는 그 배경과 조건을 살펴봐야 한다며, 스리랑카 역사를 공부하게 한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이라크전이 일어나면서 스리랑카 역시 외세 개입과 군사화, 평화협정 결렬, 미군의 타밀족 7만 명 학살 등의 상황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페르난도 교수는 오늘까지 20년간 스리랑카로 돌아갈 수 없는 망명객이 됐다.

“내 신학의 한 과정은 위험을 감수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당시 사제의) 권한을 포기하는 것도 포함된다. 예수의 여정도 그러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만든 가톨릭 평화 활동가 그룹 안에서는 자신의 땅을 사랑하는 만큼 타인에게 내주는 것으로 성경의 정신을 이해했다. 자신의 문화, 언어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에게 허용하라는 것이다.”

페르난도 교수가 간담회 참석자들과 함께한 모습. (사진 제공 =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페르난도 교수가 간담회 참석자들과 함께한 모습. (사진 제공 =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페르난도 교수는 평화를 위한 활동은 신앙으로 시작한 것이었지만, 정치와 지역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다면서, “군사화된 평화를 믿는다는 것, 군사적인 안전 보장은 모세 시절의 금송아지와 같다. 금송아지를 통해 숭배하려는 신은 오늘날 세계화된 폭력의 독점체제”라고 강조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에서 신학은 믿음을 추구하는 ‘이해’로 설명되지만, 믿음의 핵심 과제는 이해가 아니라고 말한다. 믿음의 핵심 과제는 정의를 추구하고 자유를 지향하며,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인지라기보다는 감정 혹은 마음을 움직이는 정동인 것이다.”

그는 권력자들의 평화는 상대방에 대항하는 평화로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서, “이러한 제국적 평화는 목적 달성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것을 용인하기도 한다. 즉 평화를 위해서 팔레스타인, 예멘, 북한, 타밀을 소멸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적 평화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에서 99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구하는 예화를 들며, 성경은 평화를 위한 어떤 피해도 허용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또 이러한 성경의 평화 개념은 오늘날 평화학에서 '정의로운 평화' 개념으로 분명히 나타난다. 

“이는 ‘샬롬’이라는 성경 시대 언어로 가장 잘 표현되고, 기쁨과 희망을 함께 담고 있다. 칼을 녹여 보습을 만드는 것은 정의 추구에서 시작한 해방신학과 같다. 이러한 해방신학을 전쟁을 준비하고 도발하는 현실에서 샬롬에 기반한 평화신학으로 이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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