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진화-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

이 글은 <가톨릭평론> 35호(2022년 봄)에 실린 글입니다.

요리는 가정마다 성별 분담이 뚜렷한 활동 중 하나다. 주로 여자가 하고, 남자는 안 한다. 아니, 남자는 요리를 ‘못 한다’고들 한다. 과연 그런가?

텔레비전을 켜면 남자 요리사들이 ‘셰프’ 칭호를 받으며 인기몰이를 한다. 날마다 집에서 삼시 세끼를 걱정하는 주부들에게 요리하는 남자는 그야말로 로망이다. 그러나 요리 프로그램에 나온 남자 요리사들은 정작 이렇게 말한다. “저는 집에 가면 절대 요리 안 해요. 아내가 해 준 밥 먹습니다.” 프로그램 진행자와 깔깔거리고 웃는 사이 우리는 쉽게 잊히곤 하는 사실을 깨닫는다. 남자들은 요리를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구나!

남자들이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은 가사노동 말고도 많다. 예컨대 남자들도 운다. 여자들만큼 울지 않을 뿐이다. 남자와 여자의 우는 횟수를 연구해 보면 평균적으로 남자가 적고 이런 성차는 어린이들에게서도 나타난다.1) 하지만 이를 두고 ‘남자가 여자보다 슬픔을 느끼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을까. 울지 않는 것을 ‘사내다움’과 연결짓는 사회에서 많은 남자들은 단지 하고 싶은 것보다 덜 울며 살아갈 뿐이다. 어린 시기부터 말이다.

남자, 사냥꾼?

2020년 봄, 교육부에서 내놓은 '아버지를 위한 자녀교육 가이드'가 논란을 빚었다.2) 가이드는 “왜 아빠는 엄마에 비해 공감을 못한다고 할까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인간 진화의 역사에서 찾는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약 1만 2000년 전 농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람은 사냥을 하거나 열매, 뿌리 따위를 구해 생계를 이어가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진화했다. 여기서 남자는 사냥, 여자는 채집(그리고 채집과 병행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양육)을 담당하는 것으로 성 역할 분담이 진화했는데, 그 결과 아이를 돌보는 데 필요한 공감능력이 남자들에게서 상대적으로 발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자녀교육 가이드는 하루만에 삭제되었다. 그러나 정부기관 발행물에서 ‘남자는 공감능력이 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무엇보다, 학계에서는 이미 그 정당성을 의심받은 지 오래인 ‘남자, 사냥꾼’ 서사를 인용했다는 점은 매우 유감이었다.

‘남자, 사냥꾼’ 서사는 20세기 초 서양 인류학에서 출발해, 이제는 대한민국 자녀교육 가이드에도 등장할 만큼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의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자료가 지금만큼 풍부하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보다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하던 때, 인류학자들은 (남성이 주도한) 사냥이 인간 진화의 동력이라고 보았다. 사냥을 통해, 성 역할 분담을 기반으로 한 핵가족이 사람이 두 발로 걷고 신체 대비 두뇌 크기가 커졌으며, 사람과 공존하던 다른 초기 인류 종을 전멸시키며 전 세계로 퍼져 나갈 수 있었던 기반으로서의 공격/폭력성이 인간의 특징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감을 비롯해 언어능력, 공간인지능력에 남녀 차이를 설명하는 데 ‘남자, 사냥꾼’ 서사는 공공연히 등장한다.

그러나 덜 알려져 있는 것은 정작 이 ‘남자, 사냥꾼’ 서사가 20세기 중반 이후 다방면으로 비판받고 수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연구자들은 서사의 요모조모에 물음표를 달고 다양한 자료에 비추어 보고 있다.

사냥은 주로 누가, 어떻게 하는가? 현존하는 전 세계 여러 수렵-채집 사회들을 연구해 본 결과, 남자가 사냥하는 정도가 사회마다 달랐다. 사냥의 유형과 규모가 다양했고, 사냥이 식량 조달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달랐다. 채집은 사냥보다 덜 중요한가? 채집에 들어가는 노동량, 채집을 통해 획득된 자원의 중요성도 상당하다는 것 또한 밝혀졌다. 사냥은 꼭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성질과 관련되는가? 사냥할 때, 또 먹이를 잡은 뒤 고기를 나눌 때 필요한 고도의 협력과 소통 능력은 어떠한가? 남자-사냥-공격성의 연결 고리는 생각보다 느슨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고고학 연구도 기여했다. 2020년, 몸집이 큰 동물을 사냥할 때 쓰는 매우 정교한 도구들을 분석한 결과가 발표되었다.3) 연구를 이끈 하스(Haas) 교수는 2018년 페루의 어느 매장지에서 처음  발견했을 당시 도구들이 ‘당연히’ 남자의 것으로 생각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러나 도구와 함께 매장된 사람 뼈는 여성, 그것도 청소년기 여성의 것이었다.4)

남자, 사냥꾼? 과학은 우리의 믿음을 새로 고쳐 나가는 과정이다. ©Matthew Verdolivo, UC Davis IET Academic Technology Services.

예상 밖의 결과가 ‘단지 예외’일 뿐인지 알고 싶었던 연구진은, 전 아메리카 지역에 걸친 매장지 429군데에서 발굴된 비슷한 시기(이른 신석기 시대)의 사냥 도구들을 모두 분석해 보기로 했다. 성별을 확실하게 감식할 수 있었던 27군데의 매장지로 분석을 한정했을 때, 11군데에서 발견된 사냥도구가 여성의 것으로 나타났다. 서로 다른 분석법을 적용해도 30-50퍼센트의 경우 사냥 도구는 여성의 것이었다. 다수는 아니지만, 남자가 주로 사냥했다는 시나리오에서 기대되는 패턴으로도 보기 어려웠다.

연구 결과는 성별에만 기대어 역할을 규정하기 어렵다는, 이제는 상식으로 자리 잡은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운 셈이다. 설령 여전히 여자가 남자보다 사냥을 덜 했다고 하더라도, ‘남자, 사냥꾼’ 서사에서 그려내는 것처럼 사냥꾼으로서의 역할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가를 만큼 핵심적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믿음을 업데이트하기

방금 필자는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소위 전문가라 불리는 집단에 속한 과학자들이 많이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맞다/틀리다, 이거다/아니다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에둘러 말하는 것이 재미없고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앞서 소개한 페루 연구를 이끈 하스 교수는 고고학을 하는 과학자다. 하스 교수도 본인 연구를 들면서 “따라서 ‘남자, 사냥꾼 가설’은 틀렸습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제 연구는 ‘남자, 사냥꾼 가설’에 이의를 제기합니다”라고 했다. 기자들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이런 애매한 표현을 왜 과학자들은 선호하는 걸까?

과학은 가설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순간의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옳고 그른 가설은 없다. 다만 해당 가설을 지지하는 근거가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우리는 합리적 의심의 무게를 달리할 수 있을 뿐이다. 과학은 주어진 근거에 기대어 우리가 가진 믿음을 저울질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지구를 중심으로 하늘이 돈다는 천동설이 오랫동안 사실로 여겨졌고 지동설이 소수 의견으로 존재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기술이 발전해 망원경이 좋아짐에 따라 지동설에 부합하는 근거가 더 많아졌다. 누구도 천동설의 폐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았지만, 이 가설의 신빙성이 줄어듦에 따라 우리의 믿음이 업데이트된 것이다.

‘남자, 사냥꾼’ 가설도 마찬가지다. 초창기 ‘안락의자 인류학’의 대표적인 예로서, 호모사피엔스라는 종種의 진화사를 이해할 만한 자료가 부족하던 20세기 초 충분한 근거가 없이 스토리텔링에 기대어 만들어진 이 가설은 고고학, 고유전학, 영장류학, 현존 수렵-채집민 연구 등을 통해 진화인류학자들이 길어 올린 다양한 근거에 비추어 재고되고 있다.

사람의 진화사를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위의 페루 연구에서 429군데의 매장지 가운데 27군데에서만 도구 사용자의 성별을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는 점은, 정작 연구자들에게 인간의 과거가 얼마나 여전히 희미한 대상인지 말해 준다. 특히 수만, 심지어 수십만 년 전의 과거를 알고자 할 때 더욱더 그렇다. 수십 년 동안 현지조사를 하며 온전한 상태의 도구나 뼈를 발견하는 일은 복권 당첨에 비유될 정도로 극히 드물다.

그러나 제한된 자료를 통해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다. 여러분 손바닥 위에 놓인 작은 석기 파편과 뼛조각이, 석기의 사용처와 사용자에서부터 최근에는 뼛조각에서 얻은 DNA 샘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는 것 이상의 정보를 주고 있다는 사실. 여기에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실력이 필요없다. 오히려 제한된 자료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지 않도록 자제해야 한다.

과학은 주어진 자료의 한계 속에서도 배울 수 있는 (그리고 없는) 것이 무엇인지, ‘그렇다’고 하는 것이 있으면 여러 근거를 통해서도 지지되는지 다시 확인하며, 그럼에도 여전히 남는 불확실성을 확실히 하는 태도의 소산이다. 이 지난한 과정은 복잡하고 또 느리기 때문에 좀처럼 대중에게 가 닿지 않지만, 이름 없는 수많은 연구자가 묵묵한 작업 속에서 지켜나간 과학의 기본 정신이다.

덕분에 우리는 하늘이 우리를 중심으로 돌지 않아도 여전히 경이로울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사냥은 남자만이 아니라 여성 청소년도 했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전염병의 원인이 마녀들의 저주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균의 작용 때문임을 밝힘으로써 수많은 죽음을 예방하는 백신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근거에 기반하여 믿음을 업데이트하는 과학의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값진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남자에게도 기회를!

‘남자, 사냥꾼’ 서사가 애초에 등장하고 또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성차와 잘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공감을 못한다잖아.” 우리는 여러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고 또 듣는다. 계속해서 그러다 보면 정말로 남자는 여자보다 공감을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과 ‘실제로 그러한지’는 분명 다르다.(후자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학적 방법으로 답해 나가야 할 문제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의 공감능력이 설령 다르다고 해도, 남겨지는 더 큰 질문이 있다.

즉 남자들은 아이를 키우지 못할 만큼, 그래서 육아휴직은커녕 밤에도 주말에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기대되지 않을 만큼, 공감능력이 부족한 걸까? 남자가 여자보다 평균적으로 덜 운다고 하더라도, 남들을 눈물 흘리게 할 만큼 감동적인 예술작품을 못 만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반대다. 이름을 떨친 예술가에는 남자의 비율이 높다. 남자가 공감력이 떨어져서, 눈물을 덜 흘려서가 아니다.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 이름을 떨칠 수 있는 기회가 남자들에게 더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에게 덜 주어지는 기회도 많다. 아이를 키울 기회가 대표적이다. 여성가족부 가이드라인 말마따나, 남자는 공감력이 떨어져 아이를 잘 못 키운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아빠가 되고 싶은 사람들, 아이를 키우며 소중한 경험을 한 수많은 아빠들에게 부당하다. 여자는 어떤 능력이 부족하니 특정 직업군을 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2020년 영국 <가디언>에는 자발적으로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아빠들이 늘고 있다는 기사5)가 실렸다. “나는 언제나 아빠가 되고 싶었어요”라고 한 아빠는 말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그럴 기회가 없었던 남자들. 유명 가수 리키 마틴도 그중 하나다. 인공수정을 하고 대리모를 통해 쌍둥이 아들을 얻었고, 최근에는 남성 파트너와 결혼하고 인공수정으로 두 아이를 더 얻어 이제는 네 아이를 키우고 있다.

남자들이 변해서, 공감능력이 좋아져서일까? 아니다. 인공수정을 통한 대리모 출산이 가능해지고 확산되면서, 신생아의 법적 양육권을 누가 가지는지와 관련된 법안이 개정된 것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아이를 낳았는지 여부’를 ‘아이를 키울 의지’와 구별하고 양육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남자가 아이를 키우겠다고 할 때, 우리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생각한다. 왠지 아이를 잘 못 키울 거라는, 친부가 아닌 경우에는 심지어 아이를 성적으로 학대할 거라는 의심까지 더해진다.

남자는 정말로 아이를 못 키우는 걸까? 못 키울 거라는 편견이, 남자들에게 아이를 키울 기회조차 만들어주지 않는 건 아닐까?

더는 육아가 여성의 일만은 아니다. 남자들의 잠재된 육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이에 대한 합의와 지원이 필요하다. ©백승임<br>
더는 육아가 여성의 일만은 아니다. 남자들의 잠재된 육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이에 대한 합의와 지원이 필요하다. ©백승임

아빠의 진화

인류학자들의 현지 조사에 따르면 현존 수렵-채집 사회들에서도 남자는 여자에 비해 자녀와 보내는 시간이 평균적으로 적다. 하지만 산업사회나 심지어 농경, 모축을 주로 하는 사회들과 비교하면 길고, 아빠가 양육에 직접 참여하는 비율도 높다.

중앙아프리카 콩고강 유역에 사는 아카Aka 부족에서는 아빠가 아이와 많게는 22퍼센트의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입 맞추고 안아주는 빈도가 엄마보다 더 높다.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길고, 아이들의 언어적 비언어적 신호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아빠와 아이 사이에 애착도 강하다고 한다.6) 적어도 아카 부족의 사례로 비추어 보면, 인간 진화사를 통틀어 남자들이 양육에 필요한 공감능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인간의 진화는 부부, 친족 등 공동체가 함께하는 협동 육아를 주된 축 삼아 이루어졌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견해다. 다른 영장류에 비해서도 인간은 발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 진화 기간 동안 잦은 기후변동에 적응해야 했기에, 고도의 협력관계 속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인류 종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러한 배경에서, 남자들은 양육을 못하기는커녕 다른 종과 비교했을 때 특별히 잘하도록 진화했을 것이다.

특히 공감능력이 나와 친밀한 타인―전형적으로 자식, 친족, 친구―의 요구에 반응하는 데서 기원했으리라는 최근 가설7)에 비추어 보면, 남자들의 공감력이 낮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질문은 ‘남자는 왜 여자보다 공감을 못할까?’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남자들은 공감을 더 발휘하고, 나아가 육아에 참여하는 걸까?’로 바뀌어야 한다.

콩고 유역의 또 다른 수렵-채집 부족 에페Efe 사회의 아빠들은 앞서 소개한 아카 부족보다 매우 적은 평균 2.6퍼센트의 시간을 아이들과 보낸다고 한다. 이처럼 남자의 양육 참여 정도가 사회마다 다른 것은 서구 사회와 동아시아 사회를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듯, 잘 알려져 있다. 서양의 남자가 동아시아의 남자와 다르게 진화해서가 아니라, 남자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정의하고 동원하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예컨대 아카와 에페 부족은 식량자원을 조달하는 데 남녀가 협력하는 정도가 다르다고 한다. 아빠들이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카 사회에서는, 그물을 쳐서 작은 동물을 잡는 방식으로 주로 사냥한다. 여자가 남자보다 더 자주 그물 수렵을 하고, 부부가 함께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때 대화와 소통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자가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정도, 남녀가 협력할 수 있는 조건에 따라 남자들의 육아 참여 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자들이 공감을 못한다느니 육아에 젬병이라느니 하는 말은 그만두자. 아이와 눈 맞추고 공감하며 눈물 흘릴 수 있는 마음은 엄마와 아빠, 나아가 인류 모두에게서 진화했다. 수컷의 양육 참여는 인간 진화사를 관통한 주제로,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과 함께 인간이 속한 대형 유인원 과에서 인간만이 보이는 특이점이다.

남자들이 집에서 요리를 안 한다고 해서 눈물을 안 보인다고 해서 실제로 ‘못 하는’ 게 아니듯, 남자들이 육아를 덜 한다고 해서 그들이 못 하는 게 아니다. 남자들의 잠재된 육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이에 대한 합의와 지원이 필요하다. 육아를 특정 성별과 묶지 않는 인식, 남녀 공히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정책, 저녁 전에는 퇴근하는 근로 문화―남자들도 육아의 고충과 기쁨을 함께할 기회를 더 만들어 주자. 남자들은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1) AJJM Vingerhoets and Jan Scheirs, “Sex Differences in Crying: Empirical Findings and Possible Explanations”, Gender and Emotion: Social Psychological Perspectives 2(2000), pp.143-165. / Francine C. Jellesma and Ad JJM Vingerhoets, “Crying in Middle Childhood: A Report on Gender Differences,” Sex Roles 67, no.7–8(2012), pp.412-421.
2) 천지인, '21세기에 “엄마는 양육, 아빠는 공감능력 부족” 말하는 교육부', <우먼타임스>, 2020.5.2.
3) Randall Haas, et al., “Female Hunters of the Early Americas”, Science Advances(2020).
4) ‘누가 이 사냥 도구를 사용했을까?’는 생각보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은 도구(의 일부)와 그 옆에 놓인 사람 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형사, 프로파일러가 된 것처럼 고고학자도 신중하게 논리를 펴나가야만 한다. 사냥했을 경우 뼈에 남아 있을 법한 흔적(예컨대 골절)이 있는지, 사냥 도구가 매장품이었는지 여부 등에 기대어 사냥 도구를 누가 사용했을지 유추한다. 뼈를 기반으로 개인의 성정체성(젠더)까지 유추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고고학에서의 성 감식은 생물학적 성에 초점을 맞춘다.
5) Sirin Kale, '‘I Always Wanted to be a Dad’: the Rise of Single Fathers by Choice', The Guardian, 2020.1.29.
6) Barry S. Hewlett and Shane J. Macfarlan, “Fathers’ Roles in Hunter-Gatherer and Other Small-Scale Cultures,” In The Role of the Father in Child Development, edited by Michael E. Lamb(John Wiley&Sons, 2010), pp.413-434.
7) 이 부분은 다음의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Sarah Blaffer Hrdy, Mothers and Others: The Evolutionary Origins of Mutual Understanding"(The Belknap Press, 2011). 이 책은 작년 12월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이도스, 2021)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는데, ‘남성, 사냥꾼’ 서사에 대한 최신 비평도 실려 있다.
 

이수지

인간을 생명 진화사의 여정 위에서 이해하기 위해 진화인류학과 동물행동학을 공부하며, 지금은 독일 막스플랑크 인구학 연구소에서 현대 인류의 출산과 사망 패턴을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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