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가톨릭평론> 31호(2021년 봄)에 실린 글입니다.

나는 ‘여성성이 강한(?) 시대’에 현재와 과거의 남자들의 모습을 변호하고 싶지 않다. “여성성이 강한 시대”라는 표현에 오해가 있을 것 같아 설명이 필요하다. 나는 ‘여성성이 강하다’는 표현을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 우리 사회는 과거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를 벗어나 점점 여성의 발언권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특히 내가 중년의 끝자락에서 경험하건대,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훨씬 활동적이고 독립적이다. 반면에 남자들은 점점 소극적이고 의존적인 사람들이 되어 간다. 그렇다. “여성성이 강한 시대”는 중립적 표현이고, 여성들은 더 강해져도 좋다. 문제는 남성성이 성장하지 못한 데 있다.

나는 앞으로 여성성이 강한 시대에서 ‘남성의 자리 다시 찾기’라는 주제로 연재할 계획이다. 내가 말하는 “남성의 자리를 다시 찾기”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부정적 측면은 다 허물고 그 위에 새로운 남성성을 세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가 요구했던 남성성이 형성된 배경과 그 부정적 측면을 논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남성성이 무엇인지 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남성성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논하도록 하겠다. 이 연재의 첫 번째 글은 학습된 남성성과 남자들이 살아왔던 삶, 그리고 통합된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남성성에 대해 논하겠다.

진짜 사나이?

신축년(辛丑年) ‘소’의 해에 나는 60년이라는 인생의 한 주기를 채운다. 요즘 환갑에 큰 의미를 두고 잔치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는 분명 삶의 긴 세월을 의미한다. 나 역시 내가 나이가 들지 않은 척 노력해 보지만, 굳어진 나의 머리는 젊은 세대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 노화된 몸이 드러내는 느림과 게으름으로 인해 내가 그들을 따라하기도 쉽지 않다. 한국문화에서 남자들, 특히 ‘진짜 사나이’란 이미지처럼 강함만을 남성성으로 이해하도록 학습된 남자들에게 늙는다는 것은 매우 부정적인 경험이다. 늙는다는 것은 ‘진짜 사나이’에게 있으면 안 되는 약함과 결핍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함만을 추구하는 한국 남자들이 약함을 대면할 때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인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일터에서 퇴출당한 남자 중 어떤 사람은 가출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일터에서 퇴출당해 불안함에 노출된 경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단적으로 해고는 많은 노동자를 삶의 근거지에서 퇴출해 무기력하게 만들고, 그들 삶의 이야기를 한순간에 의미 없는 이야기로 만들어 버린다. 노동은 삶의 일부이지 삶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 남자들은 남자로서 존재 이유를 생산력 유무로 판단하도록 양성되었다. 그래서 실직하는 순간 남성성의 거세라는 느낌과 함께 삶의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남성성이 강한 시대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을 두고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영화 '국제시장'은 남성성이 강한 시대적 배경에서 덕수와 그의 가족이 한국전쟁과 국가 주도적 산업화 시대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이야기는 덕수라는 한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현재 나이 70대 후반 이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면 대체로 경험했을 공통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많은 사람은 여전히 일제 강점기에서 학습된 ‘국가가 개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일본식 ‘애국심’1)으로 무장된 국가관을 갖고 있었다. 그 애국심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름 아닌 국가를 위한 순종적인 희생이다. 196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북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다.2) 먼저 국가는 남자들을 군대에 동원했다. 군대는 남자들을 “거칠고 공격적인 남성성은 여성의 몸과 ‘여성적인’ 특성을 타자성의 본질적인 표시로 보고 군인들이 정복하고 파괴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게 만든다.”3)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남자들은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를 기초로 한 남성적인 군인들로 만들어졌다. 박정희는 강력한 군대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 ‘병역 특례법’을 제정해 중공업에 병역 의무자들이 노동자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게 연결했다.4)

이렇게 한국 남자들은 국가 주도적 산업화 정책에 순응해 산업 현장에 동원되어 국가를 위해서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시간을 볼 때, 한국 노동자들이 얼마나 자신을 희생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가정보다는 직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런 삶을 가족을 위한 최고의 사랑 행위로 여겼다. 그리고 많은 남자는 순종적인 사람이 되어 국가 구성원의 자격인 국민이 되었고, 노동시장에서 생산력을 바탕으로 가족의 생계 부양자로 권위를 누릴 수 있는 가부장권을 획득했다.

여성성이 강한 시대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처럼 산업화 시대에 많은 남자가 노동력을 제공해 가족들을 부양하며 가정을 위한 부를 축적했고, 가부장의 권위와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덕수가 살았던 시대와 전혀 다른 시대다. 영화 '풀 몬티'(The Full Monty)가 '국제시장'과 전혀 다른 시대적 배경을 보여 주는 예다. 1980년대 초반 영국 보수 정부의 마거릿 대처 수상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철강산업에 구조 조정을 단행해 많은 노동자가 실직자가 되었다. 이 영화는 중공업이 번창하던 시절에 가정에서 가부장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남자들이 중공업이 사양산업이 되어 점점 더 노동 현장에서 밀려나 가정에서조차 설 자리를 찾지 못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영향권에 속수무책으로 우리 경제를 내주었던 1997년에 개봉되었다.

신자유주의 경제구조 아래서 자본주의의 주도권은 완전히 금융자본으로 넘어갔고, 부의 원천이 더 이상 노동이 아니라 금융이 되어 노동의 세계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더구나 금융자본은 부를 축적 하는 과정에서 너무 쉽게 노동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 자본은 값싼 노동력을 어떻게든 확보한다. 이로써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서 생산을 위한 노동력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반면에 소비를 위한 노동력이 중요해진다. 이것이 바로 소비자본주의의 확산인데, 이 소비 자본주의에서는 남성적인 노동력보다 여성적인 가치가 훨씬 생산적이고 효율적이다. 서비스 산업을 필두로 전체 산업 영역에서 감정을 보다 더 잘 다루는 여성들이 소비를 위한 노동 현장에 등장한다.5)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 안에서만 여성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이 시대 어디에서든 여성성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조직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조직 지도자의 모습은 강력한 권력을 기반으로 한 강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결단성과 과감함을 남성성으로 규정하며 조직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가는 지도자의 모습을 더 선호했다. 반면에 섬세함과 함께 포용과 공감하는 감수성은 여성적이라 하며 불필요하게 여기곤 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조직을 이끌어 가는 리더십으로 여성적이라 했던 섬세함과 공감과 같은 감수성이 더 많은 관심을 받고 있고, 조직이 굴러가는 방식 자체에서 점차 감정을 다루는 능력이 중요해지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국제시장'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CJ엔터테인먼트)

책임감이라는 삶의 무게와 개성화(individuation)

그렇다면 남성성이 강했던 시대에 남자들이 경험했던 어려움과 불편함은 어떤 것일까? 영화 '국제시장' 이야기를 다시 해 보자. 영화의 첫 장면은 한국전쟁의 흥남철수를 다룬다. 덕수의 가족 역시 남쪽으로 피난하기 위해서 배를 타는데 막내동생 막순이를 잃어버린다. 덕수의 아버지는 막순이를 찾기 위해서 가족들과 헤어지며 덕수에게 가장의 역할을 잘하도록 당부한다. 덕수는 아버지의 이 마지막 말을 늘 가슴에 새기며 생계 부양자 역할을 자신의 팔자(운명)로 받아들이며 산다. 그러나 덕수의 부인은 그런 그가 안쓰러워 보였고, “이제 제발 당신을 위해서 살아보라고요”라며 부부싸움 중에 한마디를 던진다. 어느 날, 고지식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히 살아왔던 덕수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독백한다. “아버지, 저 약속 지켰지예? 근데 저 무척 힘들었거든예....”

덕수의 이런 삶도 분명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것을 그의 부인이 잘 지적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삶을 산다. 이런 삶은 언젠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 위기란 ‘자신의 삶’을 찾아가라는 신호다. 이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 나다움을 산다는 의미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인간 발달 과정에서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는 단계를 개성화라고 불렀다. 개성화를 거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좀 더 명백한, 좀 더 충만한 정체감을 획득함에 따라, 자신의 내적 자원을 좀 더 유용하게 쓸 수 있고 자신의 목적을 잘 추구할 수 있게 된다.”6) 개성화는 중년기의 과제이기도 하다.

왜곡된 남성성과 성장해야 할 남성성

많은 사회에서 남자들은 생계 부양자의 역할을 통해서 가부장의 권위와 권력을 획득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상당수의 남자들은 온전한 생계 부양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많은 여성은 어떤 형태로든 생계를 위해서 경제활동을 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은 여성에 대한 극심한 차별을 통해서 가부장제7)와 남성 우위의 사회체계8)를 유지했다. 또 이미 언급했듯이 한국 남자들은 군대문화를 통해서 여성 비하와 혐오를 학습한다. “지배자-남성들은 혐오를 부추기며 냉전체제가 상처 입힌 남성들에게 여성을 먹잇감으로 던져 주고, 피지배자-남성들은 자신의 불만과 불안을 지배자들이 허용한 여성들을 향해 퍼부었던 것이다.”9) 최근 성 요셉의 해를 맞아 발표된 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요셉을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필요한 ‘섬세한 남성성’의 소유자로 제시한다.10)

한편 산업화 시대에 남자들은 노동의 주체로서 여성에 대한 우월감을 증명해 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 남자들은 노동의 주체로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여성에 대한 우월감으로서 남성성은 도전받고 있다. 더 나아가 여성들도 생계 부양을 함께 책임지는 상황이 되었다. 남자들에게는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나 어떤 남자들은 이런 상황을 남성성의 거세와 수치로 이해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되기도 한다. 전형적인 ‘찌질남’의 모습이다.11)

한국 사회가 주조하고자 했던 왜곡된 남성성으로 ‘순응하는 남성성’을 언급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단 한 번도 명령에 의문을 갖는 남자들을 바란 적이 없었다. 공장과 전장에서, 명령에 순응하고 몸이 부서질 때까지 헌신하는 강건한 육체들을 원했을 뿐이다.”12) ‘순응하는 남성성’은 위계적인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위계적 문화는 군대문화를 통해서, 그리고 군대문화가 이식된 기업문화를 통해서 우리 문화 안에 자리를 잡았다. 한국 남자들은 군복무를 통해서 제도적 폭력과 희생을 정당화하는 ‘연대책임’과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는 기풍을 배운다. 그들은 또 생각하거나 의문을 품지 않고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배운다. 이런 ‘순응하는 남성성’은 진정한 자기가 없어 나다움을 살지 못하는 남성성이다.

많은 남자가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간과하고 있다. 이들은 가족과 친밀감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유대감을 쌓고 삶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벗어나 있다. 친밀감은 짧은 시간에 형성되지 않는다. 친밀감은 오랜 시간 먹고 마시고, 웃고 울고, 상처와 용서를 주고받는 긴 시간을 공유해야 형성된다. “가족과 친밀감을 형성하는 능력을 배양하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들에게 독으로 돌아온다.”13) 부자관계에서 사랑과 친밀함이 없다면, 아들은 “심리적, 육체적, 영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아버지의 부재”14)를 느끼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는 잃어버린 아들을 낳는다.15) 교황은 요셉을 ‘온유하고 다정한 아버지’로서 예수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아버지로 묘사 한다.16) 사랑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타인을 사랑하기 쉽다.

남성성의 위기는 남자들에게 기회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남성성을 성장시켜 건강한 남성성으로 회복할 수 있다. 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에서 언급한 요셉 성인의 ‘섬세한 아버지’의 모습과 ‘온유하고 다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남성성의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박노자, "나는 폭력의 세기를 고발한다"(인물과 사상사, 2005), 331쪽.
(2) 문승숙, "군사주의에 갇힌 근대"(또 하나의 문화, 2007), 42쪽.
(3) 위의 책, 79쪽.
(4) 위의 책, 87-98쪽.
(5) 엄기호, '보편성의 정치와 한국의 남성성', 권김현영 엮음,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교양인, 2017), 166쪽.
(6) 대니얼 레빈슨, "남자가 겪는 인생의 사계절"(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96), 68쪽.
(7) 최태섭, "한국, 남자"(은행나무, 2018), 130쪽.
(8) 위의 책, 79쪽.
(9) 위의 책, 115쪽.
(10) 프란치스코 교황 교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4항.
(11) 엄기호, 앞의 글, 169-171쪽.
(12) 최태섭, 앞의 책, 135쪽.
(13) 위의 책, 173쪽.
(14) Corneau, G., Absent Fathers, Lost Sons: The Search for Masculine Identity(Boston, MA: Shambhala Publication, 1991), pp.12-13.
(15) 위의 책, pp.18-19.
(16) '아버지의 마음으로', 2항.

''진짜 사나이'는 왜 사는 것이 힘들까?' 우리신학연구소 3월 줌세미나. (이미지 제공 = 가톨릭평론)
''진짜 사나이'는 왜 사는 것이 힘들까?' 우리신학연구소 3월 줌세미나. (이미지 제공 = 가톨릭평론)

3월 24일(수) 저녁 7시에 “‘성 요셉의 해’와 우리 시대의 남성: ‘진짜 사나이’는 왜 사는 것이 힘들까?”를 주제로 김정대 신부의 우리신학연구소 3월 줌 세미나가 열립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참가 신청 : http://bit.ly/36FWu78

 

김정대

예수회 사제. 1990년 예수회에 입회했고, 2000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주로 노동문제와 사회 정의 문제를 다루는 활동을 했고, 2004-11년 노동자를 위한 술집, ‘삶이 보이는 창’을 운영했으며, 요즘은 남성들에게 감성을 일깨워 주기 위한 활동을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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