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신음했던 한 해가 저문다. 하지만 혼돈과 피해는 더욱 심해진다. 어떻게든 끝나겠지 했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고, 실망은 당혹으로, 당혹은 서서히 두려움으로 변하고 있다. 끝이 보이질 않는다. 바이러스가 바로 내 옆으로 ‘훅’ 다가온 것 같다. ‘5인 이상 집합 금지’다. 연말을 맞은 거리는 적막하고 답답하다.

우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성탄을 알리는 복음 말씀이 썩 와닿지 않는다. 스멀스멀 우리 모두를 옥죄고 있는 바이러스에 포위된 우리는 누구를 메시아로 생각할까? 최근에 접종이 시작된 코로나19 ‘백신’이 메시아가 될 수 있을까? 마스크와 거리 두기에 지친 사람들의 눈길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제약회사로 쏠린다. 백신이 우리를 구원할까?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는 구원의 성지가 될까?

모두가, 백신으로 코로나19 감염병이 종식되길 바란다. 모두가, 감염병 종식으로 단숨에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란다. 한 해를 바이러스에 시달리며 지내다 보니, ‘이전’의 삶이 마냥 그립고 좋아 보인다. “아, 옛날이여!” ‘마스크 없는 얼굴’들이 함께 모여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하는 이전의 공연장 모습을 보면 울컥해지기도, 씁쓸해지기도 한다. “우리는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누구나, ‘이전’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그 ‘이전’은 과연 이렇게 ‘그대로’ 돌아가기만 하면 괜찮은 것이었나? 코로나19 감염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지구화된 세계의 실체를 그 어느 때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시장과 자본의 논리니 어쩔 수 없다며 우리가 무심하거나 무책임하게 방치해 왔던 ‘사람의 학대’와 ‘자연의 학대’가 낱낱이 드러났다. 이것밖에 길이 없다며 미친듯이 쌓아 올린 세계의 참혹한 현실을 대면하게 되었다.

백신으로 ‘만사 끝’이라는 생각은 더 큰 재난의 시작이 될 것이다. 백신으로 감염병은 끝낼 수 있지만, 우리가 저질러 놓은 근본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바이러스가 보여 준 우리의 문제를 못 본 척 방치하면, 우리가 변하지 않으면, 더 강하고 똑똑한 바이러스가 다시 온다. 이미 영국에는 감염력이 더 강한 변종이 생겼다. 백신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걸로는 너무 부족하다. 이번 사태를 백신으로만 막으면, 백신으로 막을 수 없는 재난이 닥칠 것이다.

“구원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 구세주 탄생을 알리는 오늘 복음이 알려준다. 우리를 ‘한 방’에 구원해 줄 그런 전능한 메시아는 없다. 복음에는 당시의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등장한다.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팍스 로마나’를 구가했던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다. ‘신의 아들’로 통했던 로마 황제는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지녔다. 호적 등록을 하라는 황제의 칙령에 사람들은 집을 떠나 멀리 낯선 곳으로 가는 수고를 감내한다. 황제의 막강한 권력 때문이다. 힘으로 말하자면, 아우구스투스가 메시아다. 하지만 권력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어도 평화를 주지 못한다. ‘선악과’와 ‘바벨탑’, 모두 전능한 힘을 얻으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생명과 평화가 아니라 죽음과 재앙이 올 뿐이다. “구원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

성탄의 밤. (이미지 출처 = Pxhere)
성탄의 밤. (이미지 출처 = Pxhere)

요셉과 마리아, 부인이 만삭이었지만 이들도 황제의 명령에 따라 집을 떠나야 했다. 산모가 몸을 풀 변변한 장소도 구할 수 없었다. 힘없는 사람들이다. 산모는 겨우 몸을 풀었고, 아기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놓였다. 천사들은 목자들에게 황제가 아니라 아기가 구원의 표징이라고 말한다. 아기가 어떻게 구원의 표징인가? 아기는 역설적이다. 아기는 힘이 가장 약하면서 또한 가장 강하다.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뜻의 힘이라면, 아기는 가장 약하다. 다른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는 뜻의 힘이라면, 아기는 가장 강하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움직이게 한다. 아기는 자신의 무력함으로 사람들을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아기를 위해서, 방을 구할 수 없으니 구유라도 마련한다.

예전부터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았다. 특별히 도덕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 어려움이 닥치면 십시일반 있는 것, 가진 것을 모아 할 수 있는 만큼 해결했다. 돈과 힘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내주는 ‘선물’로 어려움을 해결했다. 이 선물은 소박하고 초라했지만, 삶의 문제를 실제로 해결해 주었다.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곧 ‘구원’이었다. 구원은 저 높은 곳에 있는 황제의 권력이 아니라 없는 사람들이 맞잡은 손에서 온다.

코로나19 감염병도 비슷한 가르침을 준다. 싫든 좋든 우리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다. 혼자만 아무리 잘 살려고 해도 소용이 없다. 남이 건강해야 나도 건강할 수 있다. 서로 도와야 산다. 하느님의 구원은 우리가 맞잡은 손을 거쳐 온다. 권력자는 이런 방식을 싫어한다. 자기가 설 자리가 없어지니까. 시장과 자본도 싫어한다. 수익이 없어지니까. 실제로 시장 자본주의는 상호부조라는 삶의 그물망을 해체하면서 자기를 확장해 왔다. 하지만 없는 사람들은 구원이 상호부조로 온다는 것을 알아듣고 받아들인다. 자기들이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목자들은 구유에서 드러난 구원의 소식을 알아들었다. 목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일로 사는 사람이다. 그런 구원을 원하지 않는 권력자 헤로데는 수많은 아기를 살해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세상의 권력자는 자기를 비켜서 오는 하느님의 구원이 두렵다.

예수님도 사람들이 자신을 전능한 메시아로 여기는 것을 매우 경계했다. 세 번의 수난 예고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들며 따르던 이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메시아 상이었다. 베드로도 그랬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가혹할 정도로 매섭게 꾸짖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가장 측근인 베드로는 분명하게 알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는 불행과 재난이 계속될 뿐이다. “구원은 그렇게 오지 않는다.”

우리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세상도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백신은 바이러스는 막겠지만,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오늘도 중대 재해와 해고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이 땅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는 백신 못지않게 정의와 공정이 절박하다. 세상의 변화는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고 말 없는 자연을 소중히 여길 때 일어난다. ‘말씀’이 세상에 오시며 보여 주신 것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예수님이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시고 당부하신 것이다. “구원은 그렇게 온다.”

복된 성탄을 빕니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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