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칼럼]
요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한창이다. 역사를 단 한 권의 텍스트로 가르치고 그것을 종교 경전처럼 신봉하게 하겠다는 사람들과, 그렇게 되면 역사가 정치권력의 취향에 따라 좌지우지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정말 역사를 바꾸는 것이 가능할까?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역사는 권력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변조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3세기 초에 로마를 다스렸던 카라칼라(Caracalla)의 경우이다.
카라칼라는 아버지 세베루스 황제가 사망하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동생인 게타(Geta)와 함께 공동 황제가 된다. 그러나 카라칼라는 권력을 나눠가진 동생에 대한 불만과 미움에 사로잡혀 제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 게타를 목 졸라 죽인다. 친동생을 살해하고 단독황제가 된 카라칼라는 로마인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로마의 전통인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 기억의 말살)’ 형벌을 되살려 게타의 이름을 모든 기록에서 지워버리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이름만 언급하여도 가차 없이 처벌하였다.

카라칼라의 경우처럼 기억의 말살이나 위조는 약점을 가진 권력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하여 왔다. 왕조가 바뀌면 이전의 역사책은 수정되었고, 정권이 바뀌면 자기들의 정당성과 영도력을 과시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다. 허나 그것이 어디 역사에만 국한된 것일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나 기억들마저 특정한 의도로 조작되거나 누락된 것은 없을까? 요즘처럼 방송과 언론이 일부 세력의 선전 도구로 전락하여 버린 판국에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사실, 무엇이 진실인가의 논란은 체계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검증을 할 시간도 능력도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혼란과 피로감만 줄 뿐이다. 결국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절망 속에 인간의 비판적 이성은 마비되어간다. 그리하여 사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 채 불확실한 미래를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삶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희열은 사라지고 무기력한 유기물로서의 상처 입은 존재만 남게 된다. 이런 인간 소외 현상 속에서 그들을 세상의 주체로 새롭게 탄생시켜줄 구원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2000년 전, 율법의 억압과 지도자들의 위선에 좌절하여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유다인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현실을 직면하고 거짓에 저항한 예수의 가르침은, 그들과 다름없는 처지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도 빛나는 구원의 메시지다. 새로운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뜻밖의 소식’이다. 교회 안과 밖을 가르지 않고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상 어디에서나 삶의 주체로서 진리와 자유의 메신저가 되라는 은총의 부르심이다. 거기에는 차별도 없고 제한도 없으니 어떠한 거짓이나 감추어진 것도 숨을 곳이 없다.
지난 1년간 월간 <뜻밖의 소식>은 우리들의 삶의 지평을 예수의 메시지에 맞춰주었다. 진실이 무엇이며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며 찾아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의 세상에서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 우리가 함께 가야할 길이 어디인지 가리켜왔다. 국정 교과서 논란을 바라보며 진실의 전달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는 오늘, <뜻밖의 소식>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