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맙다, 사회교리-11]

“우리가 모두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창세 4,9)고 물으시는 하느님의 외침에 귀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노예가 되어 버린 네 형제자매는 어디에 있느냐? 불법 공장이나 매춘 조직에서, 구걸에 이용되는 어린이들 안에서, 불법 노동 착취를 당하는 이들 안에서, 네가 날마다 죽이고 있는 형제자매들은 어디에 있느냐?”(복음의 기쁨, 211항)

프란치스코 교종은 <복음의 기쁨>에서 세상이 별 탈 없이 굴러가고 있는 척 외면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오늘날 우리 도시에는 악명 높은 범죄망이 단단히 구축되어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편의로 침묵의 공모를 하여 이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교종은 내 손에 피를 직접 묻히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가 ‘죄의 연대성’ 안에 붙잡혀 있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죄 많은 불의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범죄에 가담한 이들이 내세우는 평화는 그래서 ‘거짓 평화’다.

중립을 넘어서는 정의

가난한 사람들과 정의와 평화의 문제는 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라틴아메리카 주교들은 다음과 같이 단죄한다. “가능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행동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 과감하고 정말 효과적인 온갖 활동이 수반하는 개인적 희생들과 위험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소극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모든 사람 역시 불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다.”(<메데인문헌>, 평화 18항)

교종은 “사회의 일부가 다른 이들에게 강요해서 얻은 화친이나 단순한 폭력의 부재”는 평화가 아니라고 단정한다. 이런 거짓 평화는 가난한 이들을 침묵시키거나 구슬리는 사회구조를 정당화한다. 이런 구조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은 그들의 생활방식을 거리낌 없이 고수할 수 있지만, 다른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다. 노동자들이 부당 해고 철회를 위해 파업을 선택한다고 평화를 깨뜨리는 불법행위자로 몰아세우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히려 “내가 평화를 주러 온 줄 아느냐?”고 묻던 예수님처럼 부의 재분배,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 인권을 위해 허울뿐인 평화에 저항하는 게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종은 “인간존엄성과 공동선은 자신의 특권을 좀체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안위보다 훨씬 드높은 것”이며 “이 가치들이 위협받을 때 예언자적 목소리를 드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생활에 대한 참여는 도덕적 의무”(220항)라고 말한 분이 프란치스코 교종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죄의 연대성’에 도전하는 ‘사랑의 연대성’이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처럼, 형제애에서 비롯된 연대가 우리 사회에 평화를 낳고, 죽음의 문화를 생명의 문화로 뒤바꾼다. 그리고 사랑의 연대성은 ‘은총의 연대성’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데, 왜냐하면 ‘나’를 초월해야만 타인의 아픔에 연대할 사랑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타인을 형제로 받아들이는 초월적 힘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에 은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인 <사목헌장> 24항은 “어버이다운 염려로 만민을 돌보시는 하느님께서는 만민이 오직 한 가정을 이루고 서로 간에 형제의 정신으로 상종하고 대우하기를 원하셨다.”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많은 이들이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고 싶어하는 우리의 양심을 자극한다.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 것도 필요하지만, 죄악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 것도 죄악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지옥을 면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내 사랑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을 증거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과 맺는 연대로 드러난다. 지금 비 맞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서서 비를 맞는 일 또한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슬퍼하고 있을 때 그분도 함께 슬퍼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자기만의 우산을 접고 그들과 더불어 비를 맞을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느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게 ‘그리스도교적 연대’다.

이러한 연대감을 <사목헌장>에서는 첫 마디에 언급하고 있다. “기쁨과 희망, 슬픔과 번뇌, 특히 현대의 가난한 사람과 고통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번뇌인 것이다. 진실로 인간적인 것이라면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다. ...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모여 성부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성령의 인도를 믿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구원의 소식을 들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단체는 사실 인류와 인류 역사에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체험한다.”(1항)

그래서 교회는 하느님 백성의 신앙을 증거하고, 여러 가지 인류의 문제를 복음의 빛으로 해명하고, 하느님의 구원의 힘을 인류에게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이 속해 있는 인류 가족 전체에 대한 연대성과 존경과 사랑을 가장 웅변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3항) 이처럼 교회와 신자들은 이 세상과 깊이 결합되어 있으며, 그만큼 세상의 고통에 민감해야 하며, 그들 안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연대할 의무를 지닌다.

이웃은 또 다른 ‘나’

각 사람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이웃을 ‘다른 나’로 간주해야 한다. 먼저 이웃의 생명을 존중하고 이웃이 인간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는데 필요한 수단을 보장해 주며, 가난한 나자로를 깡그리 무시한 그런 부자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시대에는 만민에게 가깝게 다가가고, 기회가 닿는 대로 효과적으로 만민을 섬기며, 버림받은 노인들을 돌보고, 부당하게 무시당하는 이방인 노동자들을 돌보며,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의 대가를 이유 없이 참아내야 하는 정당한 자녀들을 돌보며, 추방당한 사람들을 끌어안고,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켜주면서 우리의 양심을 꾸짖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의무 수행이 절실하다.(<복음의 기쁨>, 28항)


뜻밖의 소식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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